[홍성석의 ‘선흘소담(善屹小談)']

▲ 화가 홍성석
선거를 앞두고 있는 요즈음 정치권에서는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정책이나 후보자의 인간 됨됨이 보다 특정의 이미지를 만들어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이미 몇 번의 선거과정을 통해 ‘이미지 선거’의 효과를 실감했으니 경쟁 진영의 ‘이미지 전략’에 예민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일게다.

사실 이미지 전략은 비단 정치권만이 아니라 오늘 날 개인이나 기업, 자치단체, 국가 등 현대사회를 이루는 모든 주체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존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이미 이 사회가 쏟아내는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며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많은 이들은 또한 ‘정보홍수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눈만 뜨면 TV, 인터넷, 온갖 광고물, 인쇄매체 등이 쏟아내는 넘쳐나는 각종 텍스트와 영상정보가 우리의 눈과 감성을 자극한다. 길거리에서 조차 거대한 전광판의 현란한 영상과 각종 광고문구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 그림: 홍성석作 ‘인간, 그 존재에 대한 독백’, 116.7×90.9(Cm) Acrylic on Canvas 2001

‘정보’가 모름지기 자신의 소화능력을 넘어서면 그것은 공해에 가깝다. 과다한 정보는 오히려 이성적 판단을 흐리고 오류를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 처리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으면 과부하가 걸려 다운되고 만다. 컴퓨터가 생명체라면 ‘다운’은 곧 ‘죽음’이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컴퓨터와는 조금 다르다. 인간들은 대체로 입력되는 정보의 양이 과다하면 ‘이미지화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그것은 받아들인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성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세상을 바라보는 즉, 사물의 ‘실제’보다 ‘느낌’으로 사물을 받아들이는 ‘이미지적 인식’의 경향을 보인다는 말이다. 이 같은 이미지적 인식은 실제 존재로서의 사물을 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조작된 이미지에 의해 대상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소위 ‘착시’와도 같은 인식의 오류를 낳게 하기도 한다.

‘이미지’는 이처럼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결정적인 문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의 과부하’로 오늘날 급격히 재생산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 허상의 ‘이미지’를 진짜인양 맹목적으로 쫓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각종 미디어는 그 중심에서 허상적 이미지 생산에 열을 올린다.

바람직한 현상은 분명 아닌 듯 하다. 그러나 현실이다. 이미 ‘이미지’는 우리 시대의 트랜드로 자리 잡고 있다. 현 사회를 이루는 어떤 주체도 이 트랜드를 소홀히 해서는 결코 성공적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영상시대의 ‘이미지’는 논리적 내용보다 직관적 감성을 통해 소통한다. 소위 ‘시각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미술 창작자인 필자도 요사이 영상세대와의 세대 차이를 느낄 때가 더러 있다. 별 생각 없이 보고 있는 텔레비전 광고에서 현란한 장면들이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나면 방금 지난 광고가 무엇을 광고하고자 했는지 아리송할 때가 간혹 있어 딸아이에게 물으면 늙은이 취급 받기 일쑤다. 이처럼 영상세대들에게 ‘이미지 광고’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기법으로, 포스트모던적 영상 이미지들이 구현하는 것은 구체적인 논리나 언어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감각적 소통 방식을 요구한다. 그것은 지적인 향유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향유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무의식으로 잠재되는 위력도 또한 놀랍다.

과거 어느 시대엔들 인위적으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대도 없었겠지만 이처럼 ‘이미지 전략’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이미지 전략’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해서 생산자적 입장에서의 보다 적극적인 이미지 창출 전략과 더불어 소비자적 입장에서, 강요되는 이미지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또한 시대적 요구가 되어 버리는 순환구조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천민자본주의의 폐해일 수도 있겠다.

어떻든 오늘 날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넘쳐나는 ‘이미지’에도 질이 있어서 그 품격과 가치에 따라 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또한 천차만별이다. 기본을 갖춘 고급스런 ‘이미지’는 우리 사회의 감성적 만족도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순기능으로 역할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대적 흐름이라고 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저급한 싸구려 이미지 조작 경쟁을 벌인다면 그건 정말 작은 일이 아니다. 그로 인한 심각한 폐해는 이 사회의 신뢰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적 능력을 가진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 제대로 인정받는 사회, 기업은 사회적 기여도와 운영체계의 견실함으로 기업가치가 평가되고, 상품은 기업의 이미지가 아니라 상품자체의 가치로 소비자에게 사랑 받아야 하며, 예술품은 작가의 명성이나 로비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품이 갖고 있는 가치에 의해 올 곧게 평가되는, 외모나 학벌보다 실력으로 개인의 능력이 평가되는 세상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절대 명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본 가치 위에 이미지를 통해 획득되는 감성적 만족까지 더해지는 사회가 세련된 문화사회의 조건이다. 따라서 이제 ‘이미지 전략’에 앞서 기본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 구성원들의 사회적 ‘의무’이며 도덕적 차원의 ‘자기관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나아가 대중적 입장에서는, 무척 번거로운 노릇이로되 치장된 이미지의 이면에 숨은 본래의 모습을 올 곧게 보려는 ‘이미지 소비자’로서의 현명한 지혜가 무엇보다 요구되는 시대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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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홍성석님은 조천읍 중산간 마을의 '善屹山房'에서 자연과 벗삼아 자신의 창작세계를 일구어 가고 있는 분입니다.
그동안 6번의 개인전과 150여회의 국내외 초대전 및 단체전에 참가한 바 있습니다.
홈페이지 '선흘 소담'(http://seokart.com/)을 통해 관객과 창작세계를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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