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명경문구’ 제주 最古·유일본 공개
1296년 묘련사에서 제작…抗蒙의지 확인

▲ 금광명경문구권하 간기.
【서귀포남제주신문】고려시대 제주에서도 목판이 판각된 사실이 확인됐다.
1296년(고려 충렬왕22년) 제주도 묘련사(妙蓮社)에서 판각된『금광명경문구 金光明經文句』(사진)가 바로 그것인데, 현재까지 제주에서 주조된 목판본 중 최고본(最古本)이며 고려시대 제주의 유일본(唯一本)이기도 하다.

이 같은 사실은 서귀포시청 문화재담당 윤봉택 씨가 그동안 일반자료로만 전해오던 것을 순천 송광사성보박물관에 보관된 『순천송광사장고려판천순판불전(順天松廣寺藏高麗板天順板佛典)』의 내용을 통해 고려시대 제주에서 ‘금광명경문구’ 목판본을 간행한 기록을 확인하고 관련 자료를 25일 공개했다.

‘금광명경문구’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진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이 주조(1236~1251)된지 45년이 지난 1296년에 제주 묘련사에서 주조된 것으로‘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판각했던 팔만대장경과 마찬가지로 제주인들의 항몽의식을 엿볼 수 있는 제주 최고(最古)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는 1269년 제주도가 몽고가 세운 원나라의 지배시기여서 안팎으로 매우 어려웠던 정세였음에도 불구, 불경(佛經)을 판각하여 배포한 사실을 볼 때 항몽의식을 고취시키는 방편과 함께 당시 천태종의 부흥과도 연관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목판본이 제주도 묘련사(현재 북군 애월읍 광령리 대각사 인근)에서 간행된 사실은 ‘금광명경문구’의 하권 말미의 간기(刊記)에 《금광명경문구소 권하 원정이년고려국제주묘련사봉선중조 간선폭포사주지 안립(金光明經文句?卷下   元貞二年丙申歲高麗國濟州妙蓮社奉宣重彫  幹善瀑布寺住持禪師 安立)》이라 하여, ‘금광명경문구’가 1296년(고려 충렬왕 22년) 고려국 제주 묘련사에서 폭포사(瀑布寺) 주지인 안립(安立)선사의 주도하에 판각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자료를 공개한 서귀포시청 윤봉택씨는 “목판이 제작된 시기는 원의 세력이 매우 막강했던 때라 특산물 공출 등 제주사람들이 많은 피해를 입던 시기로서 당시 불교 승려들이 종교를 빌어 국난을 극복하려했던 의지가 아닌가 한다”고 했다.

한편 제주불교사연구회장 오성스님도 “작은 변방의 사찰에서 목판 판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제주불교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법화사 중창 직후 이루어진 목판제작 사실은 고려시대 제주불교사를 연구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사료”라고 밝혔다.

이번 ‘금광명문구’의 제주 제작사실은 윤봉택(서귀포시청 문화재담당 尹奉澤)씨에 의하여 알려졌다.
그동안 일반자료로만 전해오던 것을, 1934년까지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 권하(卷下) 1책(冊)이 보존되었던 순천 송광사성보박물관과 1938년에 당시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 권하(卷下) 1책(冊)을 직접 조사하여 사진으로 인화 편집한 『順天松廣寺藏高麗板天順板佛典』의 자료 사실 확인을 통해 제주도에서 ‘금광명경문구’가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제주에서 판각된 목판본 어떤 의의가 있나?

 우리나라가 외국에 대하여 우월성을 갖는 것은 바로 인쇄문화에 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그렇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불국사 ‘무구정광대다라니’가 그렇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직지(直指)’는‘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서 1377년(고려 우왕3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으며, 본래 상·하 2권이었으나, 현재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첫째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Manuscrit Orianteaux)에 소장되어 있다.
 그동안 고려시대 목판 주조가 전무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제주에서, 그것도 고려조의 1296년의 제주도는 원의 지배하에 놓여있던 시기로서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정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주에서 불경(佛經)목판을 판각하여 배포하였다는 것은, 당시 제주의 문화수준이 결코 낙후된 것이 아니었으며, 종교적으로도 불교 승려들이 불력(佛力)을 빌어 외세를 물리치고 이를 계기로 제주인들의 항몽의식을 고양하는 방편으로 삼았을 것이다.

즉, 제주도에서 ‘금광명경문구’가 간행된 1296년은 삼별초가 1270년 11월 제주에 입도한 후 1273년 4월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된 후 23년, 법화사의 중창불사(1269~79)가 완료된 후 17년이 지난 시기로서 당시 제주는 元의 지배 세력이 매우 막강하였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변방의 작은 사찰에서 금광명경문구가 판각된 것이다. 당시에는 元의 요구에 의하여 말을 비롯한 각종 특산물 등이 元으로 강제 공출되는 등 많은 피폐가 잇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읍성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묘련사(妙蓮社)에서의 불경 판각은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금광명경의 지니는 의미로 보아 당시 승려들이 국가적인 어려움을 금광명경이라는 불력을 통해 이러한 국난을 소멸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 금광명경(金光明經)이란 무엇인가?
금광명경(金光明經)은 석가여래가 왕사성(王舍城)에 있는 기사굴산(耆??山)에서 처음 신상보살(信相菩薩)과의 대화로 시작되어 설법한 경전이다. 이 경에서 석가여래는 금광명경이 모든 경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경중의 왕이라고 하여 이 경이 간직하고 있는 의미를 크게 나타내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이 경전은 신라조부터 중국에서 전래되어 궁중에서 주로 법석(法席)이 베풀어질 정도로 호국경전(護國經典)이 되었다. 이 때문에 금광명경은 법화경 ·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과 함께 진호국삼부경(鎭護國三部經)으로 불린다.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삼국시대부터 국가에 변란이나 외침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고승을 초청하여 법회를 열어 이 경을 설법 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고려조에서는 1180년(명종 10년)3월에 불같은 붉은 기운이 나타나자 이를 불력을 빌어 소멸하고자 하여 금광명경 법석을 대안사(大安寺)에 차려 이러한 기운을 소멸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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