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㉞>

을미년, 한 해가 또 저문다. 올해도 제주도민에게 최대의 과제요 숙제인 4·3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민사회의 가장 큰 갈등요소인 이 문제를 제쳐둔 채 화해와 상생을 운위하는 건 연목구어에 다름 아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폐쇄적이고 경직된 진영논리를 넘어선 새로운 해법이 제시되지 않는 한 해결은 요원하다. 진영논리의 함정에 빠진 이데올로기란 집단이기주의이고 배타주의일 뿐이다. 진영논리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기 위해서는 해묵은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4·3논의의 초점을 ‘과거에서 미래로’, ‘제주에서 세계로’ 옮기는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론의 하나로 필자는 4·3을 예술로 승화하는 것, 곧 ‘4·3 예술의 개화(開花)’를 거론코자 한다. 요컨대 갈등과 내홍을 종식시키는 방법으로 예술만한 치료제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영국 소설가 차알즈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 진행과정, 결과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몇 줄로 간략하게 언급되는 대혁명의 전모를 소설을 통해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4·3도 마찬가지다. 100년 후, 1000년 후 우리의 후손들은 4·3을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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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사진-영화 <지슬> 포스터. 2013년 개봉한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4·3을 배경으로 한 흑백영화다. 넷팩상, 시민평론가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무비꼴라쥬상에 이어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와 선댄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는 등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에 4·3을 널리 알렸다는 평을 받았다.

4·3의 실상을 자자손손 만대에 알리는 건 몇 줄의 역사 기록이 아닌 문학이다. 4·3을 올곧게 기술하고 온당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이것이 4·3문학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요, 시대적 소명이다. 또한 제주작가들이 50년, 100년 후의 제주섬의 모습을 탁월하게 형상화한다면 2015년 지금,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이 서로 묻고 뜯는 이 탐욕과 아집과 분열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제주문학이 보여주는 ‘4·3의 미래’가 제주도민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준다는 말이다.

그런데 SNS와 영상매체가 범람하는 21세기의 문화적 풍토에서 문학의 힘은 많이 약화됐다. 4·3소재 시·소설·희곡의 독자는 기껏해야 천여명이지만 2015년 한 해 동안 한국영화의 관람객은 2억명을 돌파했다. 4·3을 극영화로 만들어 세계 3대 영화제에 출품하면 수십억이 보게 된다.

필자는 30년 동안 4·3희곡을 써왔지만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30년의 작업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걸 안다. 우리가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적 매체인 영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4·3영화를 통해 평화와 인권의 메시지가 전 인류에게 전파되면 4·3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심성에 호소하는 대단한 파급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하여 4·3의 진정한 세계화가 이뤄지면 진보·보수의 이전투구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소동처럼 하찮고 우습게 된다. 뿐만 아니라 4·3예술이 4·3의 미래를 보여주고 4·3의 세계화에 기여한다면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진보·보수 진영 스스로가 4·3역사관을 수정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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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제주 출신의 작가·감독·배우·스텝을 총동원하면 4·3영화 제작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제주도의 힘’을 만방에 과시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우리의 놀라운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섬 무지렁이의 저력을 증명해낼 것이다. ‘연평해전’의 영화화가 한 중앙 언론사의 성금 모금에서 촉발된 것처럼 제주도내 어느 언론사가 ‘4·3영화 제작을 위한 도민 성금 모금운동’을 전개한다면 필자도 기꺼이 동참할 거다.

2018년 4·3 70주년을 맞는 해이다. 70주년은 100주년에 버금가는 중요한 전기가 된다. 지금부터 착실히 70주년을 준비하자. 제주도민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역사의 긴 안목으로 100주년, 200주년을 내다보며 4·3대장정이 거보를 힘차게 내딛어야 한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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