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의 4·3칼럼> (57) 3·10파업투쟁위원장에 이어 제주도지사로 임명된 임관호  

친일행위에 이어 제주도청 간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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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관호.
‘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27) 피습 사건을 조사하고자 18일 정오 김포공항을 떠난 딘 군정장관은 당일 하오 7시 반 경 박대령의 유해를 싣고 귀임하였다. 저격 범인에 대하여서는 부내인의 행동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으나 아직 명확한 판단은 짓지 못한 채 현지에서 각 방면으로 엄중한 수사를 계속 중이라 한다. 그리고 과도정부 당국은 이번 제주도 일대의 소요사건의 수습책의 하나로 경찰책임자와 도지사의 경질을 단행하여 민심 수습에 노력하고 있다 한다. 유(柳)도지사 후임으로는 제주도 산업과장으로 있던 임관호(任琯鎬)씨가 이미 취임하여 시무중이라고 한다.’- <현대일보> 1948년 6월 20일

‘제주도 전(前)산업국장 임관호(任琯鎬)씨는 지난 5월 28일부로 제주도지사로 임명되었다는데 동 씨는 당년 49세로 일찍이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남 완도군 장성군수를 역임하였다.(같은 기사 서울신문 48. 7. 14)’ - <동아일보> 1948년 7월 14일

임관호(任琯鎬/ 豊川宗久, 1900~1950)는 제주 출신으로, 1923년 3월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1924년과 1925년 경성사범학교 서기를, 1926년과 1927년 전라남도 목포 속을 지냈다. 1928년부터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속으로 근무하다 1932년 1월 강진군 속으로 옮겼다.    

1934년부터 1938년 7월까지 전라남도 보성군 속(서무계 주임)을 지내면서 1937년 8월부터 국방헌금(contribution of national defense , 國防獻金) 모금 관련 업무에 앞장섰다. 일제는 중국과의 전쟁을 위해 국방헌금을 받았고, 국방헌금을 낸 사람들은 대부분 친일파로 간주된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으로 비행기 한 대를 기부하는 식으로 일본에 충성을 보였다. 

1938년 7월 전라남고 제주도 속(권업과장)을 맡아 1942년 5월까지 근무했으며, 1940년 4월까지는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공출과 국방헌금 모금 등 전시(戰時) 업무를 적극 수행한 공로가 인정되어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支那事變功勞者功績調書)」에 이름이 올랐다. 지나사변은 일본에서 중일전쟁(中日戰爭, Sino-JapaneseWar)을 이르는 말이다. 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盧溝橋, 베이징 교외)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1945년 9월 2일의 일본항복까지 계속된 중일간의 전쟁이다. 일본군은 삼광작전(三光作戰, 殺光 燒光 滄光) 등의 잔악한 행위로 중국의 대항전력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945년 110만의 병력을 중국에 남기고 항복하였다. 이로 인한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중국국민의 사상자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1941년 7월 훈8등 서보장(瑞寶章,Orders of the Sacred Treasure)을 받았다. 서보장은 일본 훈장 중 하나이다. 1942년 군수로 승진해 전라남도 완도군수로 부임했다. 1943년 3월 훈7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5년 5월 전라남도 장성군수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미군정의 제주도제 실시에 따른 법적 문제는 1946년 7월 2일 러치(Archer L. Lerch) 군정장관의 명의로 공포된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볍령 제94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제주도의 설치'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군정법령은 모두 6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는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됨을, 제2조는 도로서의 권한, 직무, 직능 및 직제를 구비한 도로 구성하되 도명은 '제주도'로, 제3조는 제주도는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 등 2개 군으로 구성되며, 제4·5조에서는 북군과 남군의 관할구역을 명시, 제주도의 행정구역이 2개 군 아래 1읍 12면을 두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제6조는 시행기일을 명시, '이 령은 1946년 7월31일 24시에 효력을 발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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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청.
제주도는 1946년 8월 1일부로 남한에서 아홉 번째의 도로 승격하게 되었다. 제주도의 기구는 총무국·산업국·보건후생국 등 3개국을 두었으며, 산하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을 설치하는 체제였다. 초대 도지사에는 1946년 2월부터 도사를 맡아오던 박경훈이 발령되었다. 총무국장에는 김두현(金斗鉉), 산업국장에는 임관호(任琯鎬), 보건위생국장에는 박 지사의 동생인 박영훈(朴永勳)이 임명되었다. 또 북제주군수에는 박명효(朴明效), 남제주군수에는 김영진(金榮珍)이 발탁되었다.

제주도에서 토벌작전이 한창 전개되던 1948년 5월 28일 제주도지사가 경질됐다. 극우파로 알려진 전북 출신 유해진(柳海辰) 도백이 물러나고 임관호가 새 지사로 임명됐다. 임관호는 바로 한 해 전 3·1 발포사건에 항의해 일어난 ‘3·10 파업사태’ 때 제주도청 파업투쟁위원장이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임관호는 그해 3월 31일 도청 간부 10여 명과 함께 경찰에 전격 연행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파업 총사령 수락이 부하들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 곧 풀려났지만, 한동안 ‘요시찰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5월부터 1949년 4월까지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다. 1950년 5월 제주도 노동조정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그해 병으로 사망했다. 제주도정은 출범 초기부터 극심한 도민의 식량난에다 인민위원회 조직의 견제에 부닥쳐 시련을 겪었다.

‘국무위원 회의에서는 제주도지사 임관호(任琯鎬)씨의 사임에 따르는 후임으로 동도(同島)출신 김용하씨를 내정하여 근근(近近) 임지로 향하리라고 한다. 동씨는 성대(城大) 출신. 교육계에 다년 공헌하였으며 최근에는 상과대학 교수, 과정(過政)시에는 물가행정처 기획국장을 역임하였다.’ - <경향신문> 1949년 5월 4일

3·1사건 이후의 검거 선풍 

‘금반의 총파업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지난 12일 오전 11시부터 도지사실에서 박도지사와 내무국장 김두현씨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유지, 각 파업단체의 대표자 50여명이 회합하여 파업에 대한 요구조건이 속히 관철되어 종전상태로 회복하도록 할 것과 파업중 30만 도민의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주도 민생문제 임시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는 13일부터 개시하리라 하는데 당일 선정된 부서 책임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에 박명효(朴明效)씨, 부위원장 김두현(金斗鉉)씨, 총무부 김원중(金元仲)씨, 조사부 최남식(崔南植)씨, 교섭부 임관호(任琯鎬)씨, 식량부 백낙희(白樂希)씨, 상공부 이인구(李仁九)씨, 교통통신부 오규일(吳奎一)씨’ - <제주신보> 1947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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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청 파업 성명서 요지.
‘제주도의 관공서파업단과 제주인민들은 제주도 상공국장 임관호씨를 파업 총사령에 추대하였다 한다. 동씨는 경찰당국과 교섭 중이라 하는데 하등의 결말을 못보고 있다 한다.’ - <독립신보> 1947년 3월 16일

‘검거에 검거가 계속되어 결말을 예상치 못하게 하는 파업사건에 대한 검거취조는 그 수 무려 200여 명에 달하였다 함은 이미 본지에 기보한 바이거니와 동 사건에 대한 취조가 일단락을 지운 것처럼 보이던 거월 31일에 이르러 돌연히 또 검거선풍이 일어나 31일, 1일 양일에 도 산업국장 임관호(任琯鎬)씨를 위시로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 인사과장 송인택(宋仁澤)씨 회계과장 강산염(姜山炎)씨 등 도 간부 10여 명을 검거 취조 중이라는 바 특히 관공서에 치중하여 취조를 개시한데 대하여는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으며 예상외로 광범위한 파급으로서 귀추는 극히 주목되고 있다.’ - <제주신보> 1947년 4월 4일

1947년 3월 1일은 제주현대사에서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큼 역사흐름의 한 획을 그은 날이었다.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맞아 제주도 좌파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군정경찰이 발포함으로써 제주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군정당국은 응원경찰과 서청 등 우파 청년단체원들을 제주에 대거 내려 보내 물리력으로 검거공세를 전개함으로써 미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이 전면 대립국면으로 돌입했다. 결국 3‧1절 발포사건은 ‘4‧3으로 가는 도화선’, 곧 기점(起點)이 되고 말았다. 

1947년 3월 10일부터 제주도에서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파업은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이날 정오 제주도청에서 직원 간담회가 개최됐다. 이 간담회를 통해 3‧1사건진상조사단에 진상보고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즉각 청원(廳員)대회를 소집했다.  

오후 1시 박경훈 도지사와 김두현(金斗鉉) 총무국장 등을 비롯한 1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도청 청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제주도청 3‧1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하지(John R. Hodge) 중장과 스타우트(Thurman A. Stout) 제주군정장관에게 보내는 6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정하고 “이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제주도청 청원 140여 명은 사무를 중지한다”는 파업결의를 했다. 제주도청의 파업 성명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민주경찰 완전확림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② 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을 즉시 처벌할 것.
③ 경찰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④ 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⑤ 3·1사건에 관련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⑥ 일본경관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지양할 것.

제주도청 직원들은 파업투쟁위원회를 조직, 그 위원장으로 당시 산업국장이었던 임관호를 추대하였다. 이날부터 도청을 시발로 각 직장마다 3·1사건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파업에 돌입, 한국에서는 전무후무한 관공리 대파업이 전개되었다. 관공서, 학교 단체 등 파업단체 대표자들은 3월 11일 회동, 파업의 효과적인 실효를 거두기 위해 연합적인 전선을 펴기로 하고 '제주읍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파업은 비단 제주읍의 가관 단체뿐만 아니라 삽시간에 지방으로도 번져 나갔다.

미군정은 예기치 못한 제주도의 총파업에 당황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하지(John R. Hodge) 사령부의 카스틔어(James A. CasTeel) 대령을 반장으로 한 주조선(駐朝鮮) 미군정(USAMGIK)과 주조선 미 육군사령부(USAFIK)의 합동조사반의 제주 체류기간에 총파업이 단행됐다는 점이다.

‘과거 3‧1운동은 조선민족이 다같이 조국을 찾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잔학무도한 탄압과 지도자층의 미약한 일제와의 타협적 태도와 당시 국제정세의 불리로 말미암아 허다한 희생자만을 내고 실패에 귀(歸)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거 3‧1운동을 회상할 때 감격과 새로운 희망에서 해방 후 3‧1운동을 민족독립 전취에로 옮길 단계임을 자각함과 동시에 과거의 선배를 추모하기 위하여 제주읍의 기념행사는 3만 대중이 모인 가운데 엄숙한 식을 거행하고 평화와 질서 있는 행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포악한 경관의 불법발포로 인하여 6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중경상자를 내게 되었음은 역사적 시일(是日)을 모독하고 민족적 이념마저 상실한 탄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평화군중에 대한 발포는 과거의 역사에 유례가 없으며 일제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포악이요, 해방된 조선에 있어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우리는 여사한 현실을 일관할 때 허다한 모순당착이 내포하여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30만 도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 냉정한 입장에서 고찰하고 선량한 인민과 더불어 그 진두에서 용감히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성명한다. 요구조건 ①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②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③경찰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④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⑤3‧1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⑥일본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탕할 것’ - <濟州新報>, 1947년 3월 12일.

제주도 총파업 사태는 3월 말로 일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의 지시로 3월 15일부터 파업단 관련자 검거에 나선 경찰당국은 단속 첫날 3‧1절 기념행사를 주도한 김두훈‧고창무 등 제주 민전 간부들을 구속하는 것을 시발로 파업 중이던 직장의 간부들을 속속 연행 취조하기 시작했다. 이틀 새 검거된 사람은 200명에 이르렀다. 이런 검속은 계속돼 연행자는 3월 말 300명, 4월 10일께는 500명에 달했다. 4월에 들면서 연행자 가운데 군정재판에 회부되는 사람, 훈방되는 사람 등으로 분류됐다. 구금된 사람 가운데는 고급관리, 교원, 경찰관, 단체 간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3월 31일에는 제주도청 간부들이 연행됐는데, 임관호(任琯鎬) 산업국장을 비롯한 10여 명이 경찰에 전격 연행, 제주사회에 충격을 줬다. <제주신보>는 제주도 간부 연행사실을 이렇게 보도했다.

‘검거에 검거가 계속되어 결말을 예상치 못하게 하는 파업사건에 대한 검거취조는 그 수 무려 200여 명에 달하였다 함은 이미 본지에 기보한 바이거니와 동 사건에 대한 취조가 일단락을 지은 것처럼 보이던 거월 31일에 이르러 돌연히 또 검거선풍이 일어나 31일, 1일 양일에 도 산업국장 임관호씨를 위시로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 인사과장 송인택(宋仁澤)씨, 회계과장 강산염(姜山炎)씨 등 도 간부 10여 명을 검거 취조 중이라는 바 특히 관공서에 치중하여 취조를 개시한데 대하여는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으며 예상외로 광범위한 파급으로서 귀추는 극히 주목되고 있다.’ - <濟州新報>, 1947년 4월 4일.

일본관리 출신이 제주도지사로 

‘서북청년 민족청년 대동청년 등은 미군과 경찰의 일심동체로써 인민의 생살여탈권을 한손에 틀어쥐고, 각 읍·면·리의 요소에는 인민의 주택과 공공건물을 탈취해서 거기에 사형비밀실을 설치하고 애국적인 인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길가로 지나가는 농어민마저 함부로 붙잡아다가 <당신들은 공산주의자이니 한번 토론해 봅시다>라고 소리지르며 구타 폭행 살해하는 죄악적인 만행을 서슴치 않고 감행하였을 뿐 아니라 낮이나 밤중이나 도시이거나 시골이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매일과 같이 자행하였다.’ - 金奉鉉 ·金民柱, 『濟州島人民들의 4·3武裝鬪爭史』, 日本 文友社, 1963년

‘【제주도에서 서두성 특파원 20일 발 합동】 점차 민심은 안정되어 가는 한편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는 제주전투에 대하여 각 책임당국은 이 기회를 타서 사태수습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농민의 민생문제 해결과 민심의 안정책에 대하여 임(任) 도지사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1) 민심지도에는 민의의 참다운 소리를 존중하여 사태의 급속 수습을 기하겠다. 방금 각 지방에 순회좌담회를 개최하여 실질적인 각 방면의 의견을 듣고 있다. (2) 금반 사태로써 피해를 입은 이재민 구제책으로는 중앙으로부터 국고의 보조를 받아 이재민구원회를 조직하고 강력한 구호사업을 개시할 방침이다. (3) 청년단체의 탈선행위에 대하여는 경찰당국과 긴밀한 연락으로 철저 단속할 것이며 일반 양민에게 자극을 주는 일체의 행동을 엄금하겠다. (4) 일반 행정관청은 물론 경찰 내부에까지 잠복하고 있는 탐관오리의 숙청을 기하여 일반 민심을 안정시키며 일반으로 하여금 신임을 받을 관도를 세움으로써 관민 일체화를 추진하겠다. (5) 초․중등학교가 모두 복구하였으나 아직 출석률이 40% 내지 50% 밖에 되지 않는 현상이므로 앞으로 학부형의 협력을 얻어 조속히 종전의 상태로 복구시킬 방침이다. (같은 기사 조선일보․현대일보 48. 7. 21)’ - <국제신문> 1948년 7월 21일

임관호는 4‧3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1948년 5월부터 1949년 4월까지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다. 가장 치열하게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1948년 5월 28일 반공 일변도의 강경정책을 펴온 유해진 제주지사를 경질하고 임관호를 새 지사로 임명한 바 있는 미군정은 이어 6월 17일에는 역시 제주출신인 김봉호(金鳳昊) 제8관구경찰청 부청장을 제주경찰감찰청장에 임명했다. 그 무렵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 주민의 80∼90%가 붉은 물에 물들여졌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응원경찰대는 조그만 혐의점이 보여도 사람들을 잡아들여 족쳤다. 제주경찰서 유치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차고 넘쳤다. 구속자들은 새우잠으로 지내기 일쑤였다. 발을 뻗고 잠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임관호 제주도지사의 첫 기자회견은 부임 두 달째인 7월 20일에 이루어졌다. 이 회견에서 ①민심수습 방안 ②이재민구원회 조직 ③청년단체 탈선 단속 ④탐관오리의 숙정 ⑤학교수업 정상화  등 5개항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그 뒤에 전개된 제주4·3으로 제주사회는 혼돈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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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해안마을에서 무장대를 막기 위해 돌담으로 성을 쌓은 모습. (1949.1.)

‘이재민 구제대책과 도(道)기구 개혁문제에 관하여 중앙당국과 절충코자 3~4일전 서울에 상경한 제주도지사 임관호(任琯鎬)씨는 최근의 제주도 사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주도에 있는 집을 죄다 없애라는 북로당 지령에 의하여 폭도들이 방화한 가옥 소실 동수는 무려 3,000동에 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참상을 이루고 있는 곳은 남원의 300호, 남원면 위미리 부락에 있는 400호의 민가가 지난 11월 하순경 폭도들의 방화로 한꺼번에 전소하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폭도들의 만행은 지난 11월중이 가장 악랄하여 서귀포 공립중학교, 동 면사무소를 비롯한 해안부락 1,100호에 대한 잔인한 방화는 전부 전달(11월)에 감행된 것이다. 현재 제주도에는 폭도들의 방화로 인하여 집을 잃고 헐벗은 이재민의 수가 1만 2,000명인데 그 중 8,000명은 긴급원호를 요하는 요구호자들이다. 그리하여 도 당국으로서는 이재민구호회를 조직하고 폭도의 손에 있던 것을 국군이 압수하여온 식량과 기타 구제미를 양민에게 특배하여 식량문제 해결에 비상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현지의 치안상태는 계엄령 하에 있다고는 하나 폭도들의 감언이설에는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한 양민들이 부락단위로 자경단을 조직하고 군경당국에 자기들의 주위에 있는 폭도를 속속 고발하고 있어 12월에 들어서서는 점차 호전되어 가고 있으며 본관의 생각으로는 금월 말까지는 폭도를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그리고 추곡매입은 도민 각자가 자기들의 책임량을 정부에 매도하지 않으면 중앙으로부터 부족한 식량에 대한 원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있으므로 계엄령만 해제되면 배정량 매입은 단시일 내에 가능할 것이다. 또 한가지 중앙에 있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재난을 당한 현지 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 <서울신문> 1948년 12월 9일

조병옥 경무부장은 응원경찰 450명과 수도경찰청 최난수(崔蘭洙) 경감이 지휘하는 형사대를 제주도로 보냈다. 응원경찰은 철도경찰 350명과 제6관구와 제8관구에서 선발한 100명으로 구성됐다. 1948년 5월 18일 새벽 특별열차로 서울을 떠난 이들은 목포를 거쳐 19일 아침 제주로 향했다. 5월 20일에도 응원경찰 수십 명이 서울을 떠나 제주로 향했다. 응원경찰로 인해 제주도의 경찰 병력은 약 2,0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기존 제주경찰 500명, 응원경찰 1,500명). 제주 실정을 모른 채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는 인식만 갖고 있는 응원경찰에 의해 잔혹 행위와 테러가 자행되었다.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속출에는 진압작전에 내몰린 응원경찰의 잘못 외에도 서북청년회 등 사설단체원을 무분별하게 임시경찰로 활용한 탓도 있었다. 일부 경찰들은 휴가를 이용해 무장대 혐의자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복 사형(私刑)을 가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 경찰고문관 코페닝(Lester Chorpening)은 “섬에 진주한 응원경찰대가 동료 경찰과 가족이 살해당한데 대해 복수하기로 작정하고, 잔혹한 보복을 했다”고 말했다.

경무부는 1948년 6월 17일 제주경찰감찰청장에 제주 출신 김봉호 총경을 발령했다. 김봉호는 일제시대 고시에 합격, 해방 직전에는 평북 신의주경찰서 보안과장(警視)으로 재직했던 경력이 있다. 총독부 경찰이었던 그가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경찰로 변신, 제주감찰청장으로 발령되기 직전에는 제8관구경찰청(강원도) 부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제주토박이 청장이 현지에 부임해 왔지만 제주경찰의 주도권은 여전히 응원경찰대를 비롯한 외지경찰이 잡고 있었다. 김봉호 청장의 제주 근무는 그나마 3개월여의 단명으로 끝났다. 

김봉호 청장은 부임에 앞서 조병옥 경무부장으로부터 “제주도 사건 수습에는 당신 외에는 없소”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히면서 “제주도 출신인 나는 향토애에 호소하여 우리 경찰 자신의 결점을 시정하고 민간 측에 결점이 있다면 시정할 결심이나 지금까지의 정보를 듣고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혀 유화책을 펼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조병옥 경무부장은 김봉호 청장의 제주 부임 하루 전인 6월 23일 담화를 발표, 폭동 발발의 원인을 경찰관의 비민주적 과오에서 찾으려는 것은 사고와 판단의 착오라고 주장하면서 “제주폭동 만행 수습의 근본방침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밝혀 민심수습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김봉호 청장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예고했다.

그 후 1948년 10월 6일자로 제주경찰청장이 평남 출신의 홍순봉(洪淳鳳)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피비린내 나는 토벌전이 전개되었다.

‘주고받는 총탄으로 자고 깨인 제주4․3사건도 이제 해를 바꾸어 꼬박 열 달째이다. 산과 바다의 생계 근원을 잃은 30만 도민의 생활고가 자못 우려되던 바 춘궁기를 석 달 앞둔 동도는 이제 심각한 식량기근에 봉착한 듯하다. 즉 종전 제주도에서는 매년 약 3만 석 이상의 식량을 타도에 의존해오던 상태이던 것이 꼬박 열 달 동안 총탄의 세례를 받은 틈에 일체 생산은 총파탄의 구덩이 속에 함입하여 동도 지사 임관호(任琯鎬)씨는 인접 도인 본도에 식량원조를 호소하였다 한다. 본도에서도 국부적이나마 소요사건으로 인하여 여의치 못한 식량사정 중에서도 지난 1월 8일에 5,170석의 원조와 이번 또 다시 3,000석을 원조, 반출키로 하였다 한다.’ - <동광신문> 1949년 2월 1일

‘함(咸)연대장은 기자단 일행을 포로수용소와 난민수용소로 안내하였다. 정거장 대합실 같은 넓은 방안에 다리를 펼 곳 없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이 포로와 난민이다. 제주도 태생으로 농업학교 4년 중도에 4․3사건을 당하고 이것을 계기로 파괴행동을 시작하여 식량을 조달하러 해안부락에 내려왔다가 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한 청년은 우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제주폭동은 종래 행정당국 측의 강압에 싹이 텄으며 재작년 3․1절의 시위행렬에서 경관측 발포로 4~5명이 쓰러진 것에 한층 더 성숙하였다”고. 그들은 복수를 표방하고 쉽게 전도민의 동원에 성공하였으며 당국의 억압, 투옥 등에 그들의 선동․선전은 더욱 유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미소공위만이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외치며 미국이 비록 강국이나 약소민족의 생존권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선전을 하여 도민들을 산중에 모아놓았다는 것이다. 국군의 파죽(破竹)과 같은 진격은 그들의 꿈을 깨뜨렸고 3월에 이르러는 이덕구 이하 20여 명이 무기를 땅에 묻고 분산하는 운명에 빠졌으며 서로가 투항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그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신(申)국방장관이 제주에 왔다. 여행의 피로도 풀 사이 없이 전지시찰에 들어갔고 한라산 장병의 위문이 시작되었다. 돌담만 남은 재로 덮인 인가와 죽어 넘어져있는 말과 사람의 시체더미가 눈에 띄며 시체 썩는 냄새에 점심밥도 맛이 없다. 한라산 중턱 군데군데는 연기가 난다. 폭도의 조량을 막으며 정글을 불로 태운다는 것이다. 한라산 기슭에 있는 저 유명한 관음사(觀音寺)도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있다. 파괴된 길을 수선하러 동리 민보단이 동원되었다. 남녀노소 거의 전부인 듯하다. 신(申)장관의 간곡한 훈시에 뒤이어 그들이 가지고 온 점심밥을 보았다. 약 20%는 점심이 없다. 가지고 온 것도 조․콩뿐이며 그 풍부하던 감자와 쌀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제주비바리(處女)는 20세 출가할 때까지 쌀 서말(三斗)을 못 먹는다’는 옛 기억이 머리에 도나 이는 1세기 전 이야기이고 근래는 그렇지 않았다. 뼈만 남은 근로대의 힘없는 괭이를 보는 신장관의 목은 또 막혔다. 임(任)도지사는 말한다. 동란으로 죽은 사람이 아마 2만 명은 될 것이다. 주택은 11만 7,000호중 무려 탄 것 3만 3,500호, 도민의 유일한 생업인 가축피해만도 4만 6,000마리. 전체도민은 지나간 1년간 생업을 잃었고 5,000의 해녀도, 20여 처의 대소공장도, 농토도 황폐하였다는 것이다. 브라스밴드의 나팔소리가 제주건설에 한 박자를 더 넣었다. 이(李)대통령의 제주도 시찰을 환영하는 학도호국대의 행렬이다. 수만의 도민은 광장에 모였고 간곡한 대통령의 훈시는 큰 감명을 주었다. 그들은 재건에 그리고 나라에 충성할 것을 대통령 앞에서 맹세하였다. “권당(眷堂)이니 더 쉬고 가시오” 초급중학 1년 여학생으로 조직된 국군위문단은 국군을 위문하고 내려오던 한라산 중턱에서 말문을 연다. 제주에서 권당(친척)을 만나니 반갑다고 하였다.(끝)’ - <국도신문> 1949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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