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㉟>

병신년(丙申年),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무릇 군자는 만 권의 책을 읽고(讀萬卷書) 만 리를 걸은 후(行萬里路) 세상을 논하라!” 명나라 때 서예가 동기창이 한 말이다. 군자는 독서와 여행으로 지식과 견문을 넓혀야 한다는 뜻이다. 맞는 말인데 필자는 여기에다 교만인우(交萬人友: 만인의 벗을 사귀라)를 덧붙이고자 한다. 독·행·교 이 세 가지는 다 필요하지만 특히 교만인우는 정치인, 행정가, 학자, 예술인들에게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인과 행정가는 민의를 수렴하여 현장의 목소리를 국정에 반영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으로 찾아가 이해당사자와 만나야 한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집단이주에 반발하는 청계천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천 번 넘게 만났다는 일화가 있다. 청계천 살리기 사업의 성공 이면에는 이처럼 끈질기고 고통스런 천 번의 만남이 있었던 거다. ‘문서 정치’, ‘탁상행정’에 길들여진 이 땅의 정치인, 행정가들이 성찰의 재료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남긴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수 많은 나라와 지방의 토착민들의 이야기를 종합하고 분석한 책이다. 외국인이 쓴 가장 탁월한 ‘일본문화론’이라고 알려진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재미(在美) 일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완성된 것이다. 인류학의 원조로 평가되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아마존 밀림의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 인터뷰의 산물이다. 남의 책이나 베끼고 인용하는 책상물림으로는 뛰어난 저술이 탄생되지 않는다.

예술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은 부모가 제주 출신이지만 본인은 4·3 현장에 없었다. 4·3 난리를 피해 일본으로 도피한 제주인들을 취재하여 4·3소설을 썼다. 작가도 만인과 만나야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다. 오로지 상상력만 가지고 쓴 작품은 공허한 메아리만 남길 뿐이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여가 시간을 홀로 보내는 ‘나홀로족(族)’이 늘고 있다 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15’에 따르면, 한국인 중 57%가 여가 시간을 주로 혼자서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기소외와 자폐적 성향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뒤섞여 살면서 삶을 배워 나가는 존재다. 잘난 자에게서는 지혜를 배우고 못난 자에게는 겸손을 배운다. 착한 사람을 만나면 고운 심성을 배우고 악한 사람을 만나면 반면교사나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사람을 만나서 지식과 지혜의 근본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어찌 참으로 인생을 안다고 할 수 있는가?

170965_194450_0752.jpg
▲ 장일홍 극작가

2015년 한 해를 뒤돌아 보면 정치는 엉망이고 경제는 위태롭고 사회는 혼란스럽고 문화는 싸구려 상업주의가 판쳤다. 젊은이들은 자신을 ‘7포 세대’라고 하면서 ‘헬조선’을 외쳤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일상화된 사회, ‘인간이 인간에게 이리’인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국민정신을 일깨우는 국풍(國風)을 새롭게 일으켜야 한다. 이 나라가 세계사적 도전에 응전하기 위해서는 2016 병신년 새해 벽두부터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운 르네상스가 일어나야 한다. 그 르네상스의 한 추동력으로, 한국인 모두가 만인의 벗을 사귐으로써 따뜻하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 장일홍 극작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