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병신년(丙申年) 새해 벽두에 절박한 마음으로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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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가에 핀 수선화 뒤로 산방산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제공=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 제주의소리

작은 들꽃의 노래

    길가에 핀 아주 작은 들꽃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다.
    “너는 여기서…무엇을 하느냐? 좀 바쁘게 일할 수는 없느냐?”
    그러자 그 들꽃은 이렇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여기에 그저 아름답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헨리 나우엔’의 ‘창조적 목회’)

역시 아름다운 글은 아름답게 읽힙니다. ‘그저’ 그 말…“그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 대목이 참 좋습니다. 재인용했지만, 그 감동은 여전합니다. 아주 작아서 도무지 있는 듯 만 듯한데, 자세히 보면 바위 밑에 숨죽이고 있는 작은 들꽃…그 작은 들꽃은 ‘그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누군가는 그것을 “이미 신화 속의 ‘에로스’ 곧 신의 경지를 넘어 그 본질인 ‘아카페’의 상태에 도달해 있다”고 해석합니다. “…거기 ‘신’으로 존재하고, ‘신의 기운’으로 바람처럼 흐르는 들꽃의 사유…” 안타깝게도 저에겐 그것을 재해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 한계입니다.

전존재로 노래하고 있는 작은 들꽃 하나…. 불교에서도 그걸 ‘거체전진(擧體全眞)’으로 표현합니다. 스스로의 전존재를 들어 그것이 진리임을 파지한다는…. 작은 들꽃은 그렇게 온힘을 다해 스스로를 피워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향기 되어’ 온 들녘을 넘쳐흐르는 ‘새로운 존재’로, ‘그저’ 거기에 그렇게….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밑바탕에 진리가 맥맥히 관철되고 있습니다.

자연의 온전함

그렇습니다. 존재 전체가 참(=眞)입니다. 저 빛나는 한라산과, 저 하늘 멀리 흐르는 구름조각과, 그리고 가까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하는 저 나무와, 오름 자락에 피어 있는 예의 작은 들꽃과, 우리들 개개인과, 그리고 노루와 꿩, 그것 ‘모두를 포함하는 자연’은 각각 나름의 온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각자 중심에 서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큰일입니다. ‘개발이란 이름’으로 그 아름답던 ‘제주의 자연’이 갈수록 더 망가지고 있습니다. 덩달아 인문 환경마저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자연을 지배해온’ 오만한 자취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건 여러 형태로 반영된 우리의 이미지입니다. 타성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감히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개발이라는 마음속의 조각난 파편들에 갇혀 눈앞의 아름다움과 고유한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도대체 “당신은 어떤 제주를 원하십니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에 대한 추상적 신화와 틈을 헤집고 들어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그 견고한 생활양식을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말은 무성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개발정책을 규정하는 그 ‘위기의 진정한 의미’가 숙고되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아직도 위기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적 자연의 억압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개발에 대한 수많은 언설이 만들어내는 환상 속에서 그 실체를 직시하기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패의 더 큰 원인은 자연을 ‘타자’로 간주하는, 우리들의 ‘자연 이해의 천박함’에 있습니다. 자연을 오로지 함부로 이용하고 파괴될 수 있는 ‘도구적 가치’로 보는 타성, 바로 그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일방적 지배와, 개발을 정당화하는 생각이 바로 거기서 나옵니다. 그런 생각은 급기야 ‘제주의 자연’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을 분리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내적 자연을 억압합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필연적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부르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가 결국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초래한다는 말은 그래서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연에 대해 겸손해야 합니다. 병든 소나무 하나 다루는 데도 그만큼 신중해야 합니다. 재선충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병든 소나무 하나 자르는 데 뭐 그러하냐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건 이를테면 고난에 찬 우리의 오랜 세월을 잘라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잘라내는 게 어찌 소나무 하나뿐이겠습니까? 아예 사람을 잘라내는 일마저 서슴지않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필요 없으면 잘라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 그것 또한 ‘자연의 지배’가 부른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입니다. 그건 폭력입니다. 그 안에는 ‘존재의 관계성’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삶’의 고장을

개발에 대한 인식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겸손과 절제가 비록 쓸쓸한 것이긴 하지만, ‘제주의 자연’을 함부로 취급하는 그 헤픈 생각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연을 지켜야 합니다. 그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우리의 염원’이 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주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 거기엔 동기와 이유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우리가 우리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이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모두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시간은 체험과 분리될 때 비로소 탄생합니다. 그건 ‘반성’입니다. 이 신년 벽두에 지난날을 반성하고, ‘제주의 자연’에 대한 분명한 사고를 갖는 게 그래서 중요합니다. 개발의 효과만을 부각시키는 허위의식과 목적 지향적인 그릇된 주장으로부터 ‘가치 있는 사실’을 분리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과 무능력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실로 매우 큰 도전입니다. 그래서 더욱 ‘정의로운 분노’에 의한 ‘치열한 비판’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개발은 ‘우리들의 삶’을 지키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노력이어야 합니다. 우리 고장의 역사를 계승하고, ‘제주의 자연’을 지키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키워낼 수 있는 ‘진정한 삶의 고장’! 비록 어설프지만 이게 바로 서두의 ‘어떤 제주’에 대한 저의 대답입니다. 한참 주제넘지만, 모두의 머리뿐만 아니라, 가슴에도 호소하는….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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