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주의 어·부·가] (33)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성공적인 삶은?

 인류 역사 속의 성인(聖人)들은 한결같이 어린이는 곧 어른의 거울이라고 가르쳤다. 어린이가 갖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그 부모가 갖고 있는 문제점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 어른 중심의 세계에서 어린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그 가족은 마음의 길을 잃어 방황하기 일쑤다. 지난 2013년 [제주의소리]에 ‘오승주의 책놀이책 Q&A’를 연재했던 오승주 씨가 다시 매주 한차례 ‘오승주의 어·부·가’ 코너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기로 했다. 최고(最古)의 고전 <논어>를 통해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부르는 배움의 노래가 될 것이다. 이번 연재코너가 어린이·청소년을 둔 가족들의 마음 길을 내는데 작은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편집자]  

성리학이 만든 논리, 가부장 

차별이 제도화된 사회에서는 휴머니즘이 위협을 받습니다. 차별제도의 피해자도 수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은 우리 사회에서는 겉으로는 남자가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가장 많은 폭력에 노출돼 있기도 합니다. 일제시대부터 뿌리 깊은 일본 군대 문화가 남성 사회에 그대로 녹아 있죠. 공자의 후예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쌓아 놓은 문화는 ‘유교 잔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아직도 어떤 지방에 가면 남자가 설거지를 하거나 아이와 잘 놀아주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가족 중에서도 아빠의 문제를 생각할 때 가슴이 턱턱 막혀옵니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먼데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남녀의 이미지가 생겨난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모계사회의 흔적이 보입니다. 고려시대까지 여성은 남성과 비교적 동등한 입장이었습니다. 재산 상속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지 않았죠. 고려 조정에서 여성에게 불리한 정책을 입안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주도한 귀족은 집에서 부인에게 시달리고 저잣거리에서도 아녀자들의 눈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 법안은 무산되었죠. 성(性) 문화에 대해서도 조선 후기까지 비교적 자유로웠던 흔적이 보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랑에 목마른 궁중의 여인들이 동성애를 한 대목이 나오는데, 세종대왕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 문화를 걱정하며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같은 책으로 유교문화를 반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현재의 남녀 차별이 제도화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의 일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의 후예들이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절치부심한 끝에 조선의 정권을 차지한 일명 사림(士林)들은 조선의 정신을 주조하고자 했습니다. 사림파의 성리학은 이들이 추종한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 주희(朱熹)가 정리한 주자학(朱子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남송의 주자학은 거란, 서하 등 이민족의 등쌀에 못 이겨 남쪽으로 피신하며 근근이 연명하는 중국의 자존심이 담겨 있습니다. 힘으로는 이민족을 어쩌지 못하고 문화와 정신으로나마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은 성리학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성리학은 동양인의 문명화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패배자의 자위 수단이었다는 비판만큼은 피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중국이 왜 이민족에게 실패했는지 냉철한 반성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하는 일에는 이런 구멍이 있습니다. 원나라의 침공으로 온 나라가 파탄이 났을 때 국가사업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든 일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 맥락은 병자호란 때 사회문제가 되었던 ‘환향녀(還鄕女)’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이 못 나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고 그 피해를 여성들이 고스란히 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에게 ‘환향녀’라는 악명을 붙이며 공개 이혼을 청구하기도 하고 자살을 강요하기도 했죠.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사대주의(事大主義)라는 것은 큰 나라를 고정시키고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청나라가 힘을 키워서 명나라를 물리쳐도 대국(大國)은 오로지 명나라뿐이죠.

가부장(家父長) 제도는 성리학자들이 만든 논리이며, 일제시대 당시 일본 역시 통치에 적극 활용하면서 현대 사회까지 굳어졌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가장, 가족들의 말 못할 사연을 살피지 않는 가장, 즉 ‘찌질한 가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남편과 아빠의 위치를 되찾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유목민이자 이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농경민의 전통을 가진 중국의 문화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니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silhouette-1082129_960_720.jpg
▲ ⓒ PIXABAY

찌질함을 이겨내는 방법

공자는 ‘문(文)’이라는 글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문이란 몸에 새겨진 무늬를 말하는데, 교양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자가 입이 닳도록 강조한 것이 바로 ‘문’입니다. ‘문’을 허락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격조 높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이 글자를 받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자공이 스승에게 물었다. “공문자(孔文子)에게 ‘문(文)’의 시호를 붙인 까닭이 있나요?” 공자가 말했다. “부지런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아랫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때문에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 「공야장」 편

공문자는 위나라의 대부였습니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 자로를 위나라 왕인 출공(出公)에게 보낸 것을 보면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 같습니다. 위나라는 당시 정치 상황이 복잡하고 위태로웠기 때문에 공문자는 공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노나라로 귀국했죠. 위나라의 정치 상황은 『논어』에 여러 구절을 통해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부지런하고 배우기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기꺼이 조언을 구하고 귀 기울이는 덕목만 있다면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불교가 고려시대 후기부터 고리대금업을 하고 부패하며 성리학자들의 공격을 받아 기울어진 점을 생각합니다. 성리학 역시 조선을 건국했고, 조선 사람의 정신을 대표했지만 역시 부패로 얼룩지며 나라를 빼앗기는 데 원인을 제공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마치 상한 우유처럼 일정 정도 시간이 지나면 유효기간이 끝나버리는 게 남성 중심 문화의 특징입니다.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되돌아보지 않는 남편들은 끝이 좋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서야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논할 수 있습니다.

171902_195658_1217.jpg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