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고려시대 삼별초에 의한 마지막 항몽(抗蒙) 유적지다. 몽골은 고려 삼별초의 활동거점이었던 항파두리를 고려 원종 14년(1273년)에 점령한 후, 1374년(공민왕 23년) 최영(崔瑩)장군의 정예군이 원나라 목호(牧胡)군을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 전투에서 전멸시키면서 제주는 100년간의 긴 수렁에서 벗어난 역사적 아픔이 남아있다. 최근 항몽유적의 문화콘텐츠화라는 주제로 한국몽골학회에 논문을 발표한 김일우 박사의 논문을 매주 2회(수·토), 총 6차례 연재한다.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머리말
②제주 항몽유적의 국제적, 국가적 관점
③제주의 지역적 관점, 고고학·미술사적 관점
④제주 항몽유적의 분포상과 문화콘텐츠화: 항파두성과 성내 항몽유적 
⑤제주 항몽유적의 분포상과 문화콘텐츠화: 항파두성 밖 및 문화콘텐츠화 지향성
⑥맺음말 

[제주 항몽유적의 문화자원화] ②제주 항몽유적의 국제적, 국가적 관점 
/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2. 제주 항몽유적의 역사성
(1) 국제적 관점

‘제주항파두리항몽유적지’와 그 밖의 항몽유적은 일 국가의 관점에서 벗어나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애초, 몽골의 고려 침략도 고려 정복만을 노렸던 것은 아니었다. 몽골의 제주 삼별초 정벌도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을 겨냥했던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또한 삼별초의 제주입거도 돌발적 상황이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몽골이 전개한 세계정복사업의 추진 및 그 역학관계라는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라 하겠다. 그런 만큼, 제주 항몽유적도 국제적 관점에서 역사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4.jpg
▲ 13세기 몽골의 아시아 침입도(출처=윤용혁, 2014,『무인정권ㆍ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삼별초』, 혜안) ⓒ제주의소리
5.jpg
▲ 13세기 몽골의 판도(출처=윤용혁, 2014,『무인정권ㆍ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삼별초』, 혜안) ⓒ제주의소리
13세기부터 14세기 후반 무렵은 몽골의 시대라 할 수 있다._#6 몽골은 13세기 초반부터 발흥하기 시작해 중국 대륙과 고려 및 안남(安南) 지역 등의 동아시아를 비롯해 유라시아 지역에 걸쳐 100여 년 동안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형성했다. 이때 몽골은 역사상 단일국가로서 최대의 판도를 이뤘다. 이러는 동안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고, 이에 맞서 고려는 40여 년 동안 대몽항전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몽골의 고려 침략은 중국 대륙의 금(金) 및 송(宋)에 대한 전략과도 맞물려 있는 한편, 고려를 징검다리로 동쪽 끝 일본 열도로의 진출과도 연결돼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고려의 대몽항전도 우리나라 일 국사의 관점이 아니고, 국제적 관점, 특히 동아시아 전체사의 시각에서 조망해야 할 것이다.

몽골이 제주 삼별초 정벌에 나섰던 일도 국제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제주 지역은 원종 14년(1273) 몽골의 직할령으로 편입됐다. 이후 100여 년 간 몽골족의 제주경영이 이뤄졌다._#7 이렇게 된 데는 제주 삼별초의 몰락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몽골의 제주경영은 제주 삼별초 몰락 이전부터 이미 계획ㆍ추진됐던 일이기도 했다. 이는 몽골 황제 쿠빌라이가 원종8년(1267)에 자신의 조정으로 제주 성주(星主)를 불러들여 알현했던 일로부터 엿보인다. 또한 쿠빌라이가 제주 성주를 불러들였던 것은 제주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곧, 제주는 남송과 일본을 잇는 해상의 요충지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래서 몽골은 제주 지역을 남송과 일본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 만큼, 몽골이 제주 삼별초 정벌에 나섰던 일은 13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던 몽골의 남송ㆍ일본정복사업과 맞물려 이뤄진 것이고, 몽골의 제주경영은 삼별초의 제주 진입과 몰락이 아니더라도 예견됐던 일이라 하겠다. 곧, 제주가 몽골의 직할령으로 편입됐던 사실은 우연, 혹은 돌발적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삼별초의 제주입거도 국제정세의 역학관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그래서 삼별초 정부가 진도에 자리 잡은 뒤, 제주 지역을 배후 거점으로 확보하고, 진도 함락 뒤에는 삼별초의 잔여 세력이 제주에 들어왔다. 이로써 제주는 고려의 마지막 항몽거점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제주가 마지막 항몽거점이 됐던 것은 어쩔 수 없었거나, 우연할 일이 아니라 이미 계획됐던 일이라 하겠다. 
6.jpg
▲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내용 중 의문점을 기록한 일본의 ‘고려첩장불심조조’ 문서 (제공=국립제주박물관, 도쿄대 사료편찬연구소 소장) ⓒ제주의소리
7.몽골병, 좌 신안해저 출토, 우 제주출토, 높이  우 22.jpg
▲ ‘몽골병’, 좌 신안해저 출토, 우 제주출토, 높이 우 22.0㎝ (제공=국립제주박물관) ⓒ제주의소리

곧, 제주는 무신정권 말기 3차례나 대몽항쟁을 이끌어갈 정부가 들어설 후보지, 또한 항몽의 마지막 거점으로 진작부터 거론돼 왔었던 곳이기도 했던 것이다._#8 이는 무신집정자가 남송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의 요지에 위치했던 제주에 근거지를 잡은 뒤, 이들 양국과 더불어 대몽연합전선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과 연계된 듯싶다. 이와 관련해서는 삼별초가 진도로 항몽거점을 옮아간 뒤 일본에 외교문서를 지닌 사신을 보내 항몽연합전선을 꾀했던 사실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삼별초의 대몽항전이 몽골군의 일본 침략을 저지하는데 효과가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하고 있다. 만일 고려의 끈질긴 대몽항전이 없었다면 분명 몽골군의 일본 침략은 훨씬 조기에 추진됐을 것이고, 그러했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_#9 또한 나가사키 현 다카시마 연안 출토 유물 중에는 흑갈색 도기가 다수 인양됐다. 이는 대몽항전이 전개됐던 강화도와 제주도 및 원나라 때 무역선에서도 각각 확인할 수 있는 것, 이른바 ‘몽골병’과 유사하다. 이들 도기는 편년이 삼별초, 혹은 그 직후 시기로서 13세기 말경 몽골세력의 확산과 관련을 갖는 유물이다. 
8.jpg
▲ '계유년 고려와장조' 탁본(출처=윤용혁, 2014,『무인정권ㆍ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삼별초』, 혜안) ⓒ제주의소리
9.jpg
▲ 우라소에 성 와당(좌)과 진도 용장성 와당(중) 및 항파두성 와당(우) (출처=윤용혁, 2014, 『무인정권ㆍ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역사 삼별초』, 혜안) ⓒ제주의소리

더욱이 근래에 들어와서는 오키나와의 고려기와가 삼별초 이주 집단에 의한 것이라는 추론도 나왔다._#10 이는 오키나와의 우라소에성[浦添城] 유적 출토의 고려기와 중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명문 기와에서 비롯됐다. 그동안 계유년에 대해서는 1153년, 1273년, 1393년으로 보곤 했는데, 1273년이라는 설이 제기됐던 것이다. 이 견해는 1273년이 바로 제주 삼별초의 패망시기였던 만큼, 제주 삼별초가 패망한 뒤 그 일부가 보트 피플이 돼 외양으로 빠져 나갔고, 이들 집단이 오키나와 계유년 기와의 제작자라 보고 있다. 이에 제주 삼별초의 대몽항전과 그 유물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와도 무관치 않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제주 항몽유적은 우리나라와 중국 및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공유하는 한편, 삼국의 문화적 교류도 대면하는 통로로서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로써 제주 항몽유적은 국제적 관점의 접근이 반드시 수반돼야 함이 드러난다. 이는 이들 유적이 13세기부터 동아시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세계대제국을 형성했던 몽골과 관련해 파생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2) 국가적 관점
제주 항몽유적은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인 삼별초와 관련해 생겨났다. 이들 유적이 지닌 역사성은 고려의 대몽항쟁에 대한 평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삼별초의 항몽활동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우리 민족국가의 존립도 감안해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_#11

고려사 연구 가운데 삼별초 항쟁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난해한 주제는 별로 없다. 삼별초를 반역자 집단으로 평가하는 전근대적이며 고전적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고려인의 전통적인 민족의식의 발로에 의해 비롯된 민족항전”이라고 치켜 세우는 관점도 있고, “삼별초의 항쟁은 민족 정신사에 남을 뿐 현재적 실익은 아무 것도 없었다”_#12고 보고 있기도 하다._#13

그동안의 연구물을 일람해 보자면, 초기 연구들은 몽골에 끝까지 대항한 삼별초 항쟁을 민족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높이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무신정권에 의해 주도된 대몽항쟁도 같은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후 무신정권의 대몽항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의 연구가 이뤄지면서,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대한 평가도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사실, 강화도 천도의 단행은 최씨무신정권이 국가의 안위를 걱정해 내린 결정이라기보다는 무신집정자 최우(崔瑀)가 자신의 정권을 보존ㆍ유지코자 행한 조처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무신정권은 몽골과의 1차 전쟁에서 패배하자, 향후 대몽침략에 대한 적절한 대비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강화도 천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는 가까운 섬이나 깊은 산 속으로 도망하라는 입보책(入保策)만을 제시한 채, 자신들은 강화도에서도 여전히 사치행각을 계속했다. 이는 자신의 정권안위를 위해 백성을 버린 행위였고, 그 결과 많은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피살됐다. 최씨정권이 주도한 항몽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곧 바로 삼별초 항전의 의의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즉, 삼별초는 최씨정권의 사병적 성격이 농후한 군사조직임으로 삼별초 대몽항전도 무신정권에 의한 대몽항쟁의 연장선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10.jpg
▲ 최씨무신정권의 항몽거점 강화도의 강화산성(제공=윤용혁) ⓒ제주의소리

이들 상반된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삼별초와 무신정권을 대몽항쟁의 동일한 주체로 파악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군사력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삼별초 항쟁을 무신정권이 펼친 항몽책의 연장으로 간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별초군과 삼별초 항쟁의 구성원은 단일하지 않다. 원종 11년(1270) 이후 4년간 지속된 대몽항전은 삼별초 항쟁으로 명명되고 있기는 하나, 그 구성원에는 많은 일반민도 존재했다. 게다가 삼별초 가운데 신의군(神義軍)이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데 동원됐는데, 이들은 몽골의 포로, 혹은 부모·형제가 몽골군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신의군은 무신집정과의 사적인 연결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군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삼별초 항쟁은 삼별초군에 의해 주도됐다고 하더라도, 그 항쟁을 곧 바로 무신정권이 펼친 항몽책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돼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삼별초 항쟁은 참여 구성원이 다양하듯이, 다각적 관점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_#14 삼별초라는 용어에 매몰돼 삼별초 항쟁의 구성원을 직접 무신정권의 군사력으로 연결시켜 항쟁의 의의를 부정하는 평가나, 결사항전의 자세를 취한 대몽항쟁만을 강조하다가 무신정권에 의해 주도된 항몽책까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해는 지양돼야 한다. 그보다는 삼별초 항전의 진행과정과 구체적 내용 속에서 드러난 민중적 성격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해야만 긍정적이며 편협하지 않은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_#15

사실, 삼별초의 경우는 무신정권 몰락 이후 몽골과의 강화를 거부하고 그 대신 ‘반몽구국’의 기치를 내걸자, 수많은 일반민들이 집결해 끝까지 몽골과 항전했다. 이를 보더라도, 삼별초 항쟁은 국가사적 의의가 높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_#16
11.jpg
▲ 삼별초 이동경로(출처=삼별초 문화원형, 제주지식산업진흥원, 2005) ⓒ제주의소리
12.jpg
▲ 진도 삼별초의 항몽거점 용장성 발굴현장(제공=윤용혁) ⓒ제주의소리

삼별초 항쟁을 이해하는데 또한 중시해야 할 것은 삼별초의 끈질긴 대몽항쟁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는 삼별초 항쟁을 “민족 정신사에 남을 뿐 실익은 아무 것도 없었다”라고 평가한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고려의 대몽항쟁은 고종 18년(1231) 몽골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가 원종 14년(1273) 제주 삼별초가 몰락함으로써 40여년 만에 그 막을 내렸다. 삼별초 대몽항전의 실패는 정치세력에 있어서 반몽적 정치세력의 일소와 친원세력의 득세, 대외관계면에서는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손상될 정도로 몽골이 고려 내정에 깊이 간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jpg
▲ 제주 삼별초 항몽거점 항파두성의 성내 유적 분포도 (제공=제주문화예술재단, 항공촬영 접합사진) ⓒ제주의소리
14.jpg
▲ 항파두성의 복원토성(제공=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제주의소리

이로써 원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고려는 몽골의 수많은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대몽항전의 종식은 고려가 온갖 공물과 수많은 동녀 등을 몽골에 바치지 않을 수 없도록 했으며, 몽골의 일본정벌에도 동원돼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던 것이다.

삼별초 대몽항쟁의 실패는 정치적으로 몽골의 복속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빚어냈다. 그러나 고려가 세계제국 건설에 나섰고, 종내 단일국가로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형성한 몽골에 끝까지 저항해 복속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희박했다고 하겠다. 혹 그럴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었더라도 그에 따른 인명과 재산 손실이 광대했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고려가 몽골에 복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면, 어떠한 형태로 복속되느냐만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는 끈질긴 항쟁을 통해 몽골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삼별초의 끈질긴 대몽항쟁이 맺은 결과물은 자못 의미가 크다. 삼별초의 끈질긴 항쟁은 고려가 여타 몽골의 복속국과는 다른 몇 가지 예외적 조처를 끌어내는데 일조했다. 즉, 고려왕조가 몽골에 직접 복속되지 않은 채 왕조 자체를 유지하고, 고유의 풍습을 지킬 수 있었음은 삼별초의 대몽항쟁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려왕조의 몽골 복속 형태는 고려가 40여 년 간 지속한 대몽항쟁의 열매였다. 그러나 삼별초 항쟁이 고려의 대몽항쟁 마지막 단계에 위치한지라 고려의 몽골 복속 형태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봄이 마땅하다. 다시 말해, 삼별초의 끈질긴 항몽전은 고려왕조가 몽골의 여타 다른 복속국과 달리 왕조와 그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몽골의 부마국으로서의 지위까지 보장받는데 기여한 측면도 있었다고 하겠다. 이는 삼별초 항쟁의 평가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기도 하다.

결국, 제주의 항파두성과 그 밖의 항몽유적은 오늘날 우리의 민족국가와 그 문화가 존립하고, 자주적으로 이어 나아가는데 기여한 통로로서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각주

#6
윤용혁, 앞의 책, 31~48쪽.

#7
김일우, 앞의 책, 259~385쪽.

#8
윤용혁(1994),「삼별초의 봉기와 남천(南遷)에 관하여」, 『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 상, 일조각, 833~843쪽: 김일우, 앞의 책, 251~257쪽.

#9
윤용혁(2004),「13세기 동아시아 역사와 “삼별초” 문화」,『강화ㆍ진도ㆍ북제주군 제4차 '삼별초' 학술세미나』(기조발표문), 북제주군, 19~20쪽.

#10
윤용혁, 앞의 책, 308~312쪽.

#11
김일우ㆍ이정란, 앞의 글, 25~27쪽.
이 절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위의 연구를 많이 참조했다.

#12
이이화(1999),「몽골의 침략과 30년 항쟁」,『한국사 이야기』7, 한길사, 115쪽.

#13
윤용혁(2000),『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75~293쪽.

#14
삼별초의 대몽항전에 대한 다각적 검토의 필요성은 민현구에 의해 이미 제기된 바가 있다. 특히, 그는 “삼별초 난을 반역으로 규정한 왕조시대의 인식방법이 그릇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삼별초 난으로 귀착되는 대몽 항쟁만을 몽골의 침입에 대응한 정당한 자세로 보고, 그와 대결한 김방경과 고려 조정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결코 타당한 입론이 될 수 없다”고도 했다.(민현구「몽고군(蒙古軍)ㆍ김방경(金方慶)ㆍ삼별초(三別抄)」,『한국사시민강좌』8, 1991, 104쪽).

#15
강진철은 지방 농민과 노예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몽골과 정부의 이중적 압력의 해방자로서 삼별초에게 기대를 걸었고, 이 때문에 삼별초는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고 봤다(강진철, 「蒙古의 침입에 대한 항쟁」.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74, 389쪽). 한편 이익주는 “삼별초 항전이 갖는 의미는 강인한 민족정신 등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고려 지배층과 몽고의 결탁에 반대하는 일반민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고 함으로써, 삼별초 항전의 역사적 의의를 ‘민족항전’이 아닌 ‘민의 항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이익주, 「고려후기 몽고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 「역사비평」 24, 1994, 269쪽).

#16
김일우ㆍ이정란, 앞의 글, 9~15쪽

158368_178902_0610.png
※ 필자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의 대표 논저.

2000,『고려시대 탐라사연구』, 신서원
2002,「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 『한국사연구』119 
2003,「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변화」,『한국사학보』15.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