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좌에서 우익으로, 제주서 대단한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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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의 4·3칼럼> (59) 제주신보 사장에 이어 국회의원 지낸 김석호   

김석호, 항일단체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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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호.
'한국의 일간지 / 제주신보 /『제주신보』 사장 : 김석호/편집인 : 백상현/정치 성향 : 좌익/ 발행지 : 제주'-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주간정보요약 (G-2 Weekly Summary) (No. 59, 1946. 10. 31. 보고)

‘한국의 일간지 목록과 논평/모든 신문들은 AP(Associated Press), UP(United Press),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로이터(Reuter), AFP(Agence France Presse) 통신을 통해 도움을 받으며 국내 통신기관인 『코리안퍼시픽프레스』와 『조선통신』을 통해 지원을 받습니다. (중략) 지방지/제주/『제주신보』/발행인 및 명목상의 소유주: 김석호 주소: 제주읍 1가 1377/이전 극좌. 현재 우익. 제주도에서 대단한 영향. 발행부수: 5,000부’-주한미사절단 및 주한미대사관(American Mission in Korea & American Embassy in Korea)(NO. 133, 1949. 3. 11. 보고)

김석호(金錫祜, 1897~1960)는 1897년 8월 22일 함덕리 1898번지에서 부친 김흥수(金興
洙)와 모친 김만영(金萬永)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한학자 김석종(金錫琮)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1916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조천공립학교 교원을 시작으로 1932년 4월 조천면 부면장, 1935년 9월 제주읍 부읍장으로 승진하였다. 

1920년대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적 사상운동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1921년 조직된 ‘반역자구락부(叛逆者俱樂部)’를 발전시켜 1925년 조직된 ‘신인회(新人會)’, 1925년 9월에 결성된 제주청년연합회, 그리고 1927년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제주도지부 등이 모두 그렇다. 제주청년연합회 창립대회에는 조선청년동맹과 서울청년회의 축전이 보내져 왔으며, 조천출신 사회주의 사상가 김명식(金明植)이 서울청년회의 주축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김명식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석호는 함덕협성회를 결성하고, 후에 결성된 제주청년연합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이 되자 김석호는 학원과 언론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1946년 2월 15일 제일중학원(설립자 황순하)을 설립하고, 그해 10월 22일 오현초급중학교로 인가를 갱신하였고, 당시 오현학원 상무이사로 일했으며 1951년 8월 31일 오현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 1일 최초의 우리글 신문인 제주신보(濟州新報)가 창간되었다. 사무실은 관덕정 광장 남쪽에 있었고, 창간호는 관덕정 앞 오일장에 뿌려졌다. 미군 진주와 미군 사령관과의 회견, 일본군 작전참모와의 회견으로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장책, 일본군의 무장 해제와 철수 일자에 관한 기사를 크게 실었다.  

김석호는 제주신보의 대표이사로 사장 겸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1945년 10월 1일부터 1962년 12월까지 18년간 제주신보의 산파역이다. 김석호 외에 제주신보 경영에 참여했던 분으로는 초대도지사를 역임한 박경훈(朴景勳, 1948.2~1948.8)을 비롯, 실업가 윤성종(尹性鍾, 1948.8~1948.10), 제주주정공장 사장 이종렬(李鍾烈, 1957.6~1959.7)등이 있다. 이들이 신문경영자로 참여했던 기간은 모두 합쳐도 2년여에 불과했다. 그때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증명하듯 김석호를 다시 복귀시켰다. 

1947년 1월 1일 제주신보는 계속되는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지방 유지들을 주주로 영입해 회사를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주주로 참여한 유지들은 황순하(黃舜河)·윤성종(尹性鍾)·백찬석(白燦錫)·홍종언(洪宗彦)·김석호(金錫祜)·박영훈(朴永勳)·신두방(申斗玤)등이었고, 사장에 다시 김석호를 선임했다. 1947년 삼일절 발포사건 때 유가족 돕기 조위금 모금을 주도해 도민의 분노를 대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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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호의 가족사진.

삼일절 발포사건 현장에는 제주신보 기자 김영택(金榮澤)이 있었다. 그는 김석호의 장남이다. 제주신보 기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군중들에게 자제를 호소했다. “여러분들이 진격하면 내 등 뒤로 총알이 날아온다. 아무리 좋은 주장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고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 아니냐?” 결국 군중들을 제주신보 기자들이 해산시킨 것이다.

‘[본사특파원 김영택 신창송 조사] 3․1참사의 자취도 사라지지 않은 거(去) 17일 중문면서 또 다시 중경상자 7명을 낸 발포사건이 돌발하여 일반에 충동을 주고 있는데 본사 양 특파원의 조사에 의하면 사건의 전모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제주읍 3․1사건 파업 등으로 인하여 중문중학원 원장을 비롯한 민청 간부 수명이 경찰지서에 수감되고 있었는데 17일 하오 1시경 중문리 향사에 다수의 면민이 집회하여 3․1사건으로 인한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자는 등의 결의를 한 다음 슬로건을 들은 중학생을 선두로 일반군중 700여명이 해방의 노래를 부르면서 경찰지서를 향하여 행진하여 지서 앞에 대열(待列)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 군중과는 별개로 면장 외, 지방유지 등 11명이 지서에 들어가 석방을 교섭하고 있는 중 동 지서에 배치되었던 응원경관대는 운집한 군중에 대하여 지휘자의 명을 받고 해산을 재삼 권고하였으나 불응하였음으로 군중에게 최후의 권고를 하고 발포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완고히 해산치 않으므로 경관이 위협적 발포를 함에 군중은 일제히 지면에 엎드렸는데 이때 경관대측에서 일제히 발포하자 군중은 사산도주(四散逃走)하였던 것이다. 이 수라장화한 가운데서 중경상자 수명이 났는데 그 중에는 경관의 발포로 인하여 중상을 당한 자도 있었고 해산권고 시에 경관이 총으로 해산시키려 흔들 때 상한 자도 있다. 이 중경상자는 도합 7명이고 목하 현지병원에서 가료중이라 하는데 씨명은 여좌하다. 강상준(姜祥俊․상예리), 진철주(秦哲周․상예리), 고재호(高才浩․상예리), 고승평(高升平․상예리), 오승준(吳承俊․상예리), 변일봉(邊日奉․상예리), 강영범(姜永範․상예리). (2명은 위독상태)’-제주신보 1947년 3월 24일

김석호는 4·3사건이 일어나 사회 혼란이 계속되자 20여 일 동안 휴간했다. 제주신보는 4·3사건 당시 발행되던 제주지역의 유일한 신문이었다. 토벌대는 1948년 6월 14일 어승생진지 토벌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 지원차 파견된 11연대 정보고문 김종면 중령과 제주신보 김영택 기자, 그리고 김달삼 셋 모두 일본 중앙대 동창이었다. 김종면은 김영택을 내세워 김달삼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48년 8월 제2대 편집국장 김호진(金昊辰)이 이덕구(李德九) 명의의 포고문과 담화문을 인쇄해줬다는 혐의로 군부에 의해 구속되고, 10월 24일 처형당했다. 군부는 시중에 나돈 불온삐라가 윤전기에서 인쇄된 것으로 판단, 윤전기가 설치된 곳이 제주신보 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김호진 국장 등을 검거했다.   

1948년 10월 제주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제주신보는 매일 헌병대의 검열을 받아야했다. 또 4·3사건 진압 명분으로 파견된 서북청년단(단장 金在能)이 제주신보를 접수해 10개월 간 발행했다. 서북청년단은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하는 과정에서 항의했던 사장 김석호를 신문사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뜨려지는 등 무수한 폭행을 가했다.

1949년 10월 계엄령이 해제되고 신문사 경영권이 회복되자 김석호가 다시 경영을 맡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피난민들이 제주지역으로 건너왔다. 피난민 기운데 문인과 언론인도 많았다. 그들이 제주신보 편집을 도왔다.

그후 김석호는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북제주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1959년 9월 다시 제주신문사 사장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그가 세 번째로 취임한 것이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언론자유가 보장되자 언론매체들이 난립했다. 1962년 군사정부의 언론정책에 따라 제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제주신보와 제민일보는 제주신문으로 통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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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청년단.

3·1사건 희생자유가족 조위금 모금

해방이 됐지만 제주사회는 혼란에 휩싸였다. 1946년 흉년으로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을 때 주정공장에 쌓여있던 주정용 원로인 ‘절간고구마’ 3천 가마를 구호용으로 방출했다. 당시 기아에 콜레라까지 겹쳐 300여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이어 △3·1 데모군중에 총가난사 사건 △3·1사건에 항의하는 3·10 민관 총파업사건 △모스크바 삼상화의에 따른 신탁(信託)·반탁(反託) 군중 데모 △건국준비위원회의의 느닷없는 제주신보 운영권 인도요구 사건 △제주4·3항쟁 발발 △유격대 선전 삐라 인쇄를 주도한 김호진 편집국장 처형사건 △서북청년단장 김재능 일파의 제주신보 강제 접수사건 △이에 불응한 김석호 사장과 신두방 전무의 계엄사에 의한 구속사건 △자유당 정권에 의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언론지배 △전라남도에 예속시키려는 폐도안(廢道案) 국회통과 음모사건 △제주신보 경영권이 흔들이는 매주(買株)사건 △기자 집단 사퇴사건 등을 관통해 온 제주신보였고, 그 중심에는 항상 김석호가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과거 2년의 쓰라린 체험을 통하야 새로운 민족의 활로를 찾아야 하겠는데, 요컨대는 조선의 현 단계가 정치혁명 단계처럼 오해하는 점도 있으나 이를 감히 규정하고 실천에 옮기기보다도 우선 문제는 우리 국토를 찾아 놓은 후에 정책투쟁을 감행하여야 이치에 당한 일이다. 민족의 자유를 획득치 못한 오늘에 정책만 걸고 나서 금간판으로 한들 우리의 목적이 이뤄질 리 만무한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 아닌가.’-제주신보 1947년 1월 1일 신년사

1947년의 제주신보 신년사는 '이념적 중립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의 역량이 한데 뭉쳐 독립을 향해 매진해야 한다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각 정파 대표들의 신년사도 함께 실었는데 남로당위원장, 군정장관, 입법의원 의장 한민당 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대표 등 대등하게 취급했다. 

‘사고(社告) : 3․1사건 희생자유가족 조위금 모집/ 3월 1일 돌발한 불상사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십수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인데, 그들 희생자는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만강(滿腔)의 조위(弔慰)를 표함과 동시에 전도암담(前途暗澹)한 유가족의 생활을 구원하고 중상자를 위문하는 의미에서 본사 사회부에서는 좌기요항(左記要項)에 의하여 조위금을 모집하여 당사가(當事家)에 전달하고자 하오니 30만 도민은 이들 희생자를 동정하여 스스로 우러나는 동포애의 정의에서 다소를 가리지 마시고 거출해 주시기 앙망하나이다. △마감 : 4월 15일까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부장소(受付場所) : 제주신보사 사회부/본사에 직접 기탁하는 외에 가호방문 등은 않기로 되었사오니 이 점 양지하시옵기 바라며 각 지방에서는 서류로 직접 본사에 우송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주신보사 백’-제주신보 1947년 3월 10일

3·1사건 희생자 유가족돕기 조위금 모금운동은 제주신보사 주최로 사건 발생 열흘 뒤인 3월 10일부터 전개됐다. 신문사에서는 3월 10일자에 '3·1사건 희생자 유가족조위금 모집'이란 사고(社告)를 게재했다. 모금 취지문은 한마디로 경찰의 정당방위론과는 전면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그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노도와 같이 쇄도했기 때문에 부득이 발포했다고 주장, 마치 '폭도화된 군중'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이 취지문에서는 어느 구석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사고를 내보내면서 제주신보사 사원들은 먼저 1300원의 성금을 모았다. 3월 11일 제주읍 일도리에서 사업을 하던 고석조가 1만원의 거금을 기탁,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건축재료와 기계공구, 일용잡화를 취급하던 귀일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날 제주도 식량사무소 직원들은 2030원을, 전인홍 등 유지 3명은 300원을 각각 기탁했다.

모금운동은 전도적으로 확산됐다. 제주도청을 비롯해 항무서·전매서·세무서·우편국·무선전신국·도립병원·제주읍사무소 등 관공서 직원들도 이 운동에 동참했다. 삼양·화북·한림·애월·구엄 등 각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고사리손 모금이 전개됐는가 하면 제주중·교원양성소·오현중·대정중·애월중·성산중·김녕중·제주여중 등 중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신문사에 기탁했다. 공설시장 상인들도 4975원을 거출했다.

별항의 조위금 모금상황을 보면 '대정면민 일동'으로 7만5986원이라는 가장 많은 성금을 기탁했음을 알 수 있다. 1947년 3월 14일자는 그 시점에서 "대정면민이 인민위원회에 기탁한 성금만도 3만 원을 돌파했다"고 보도, 대정인민위원회에서 그 지역 모금운동을 주도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조위금 기탁 단체를 보면 비단 대정뿐만 아니라 제주 부녀동맹(3만1360원)·서귀포 부녀동맹(4790원)·신촌 민청(485원) 등 곳곳에서 좌파단체들의 이름이 눈에 띄고 있다.

모금운동에는 좌파조직만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우익계열의 유지들도 참여했다. 발포사건의 책임자이기도 한 제주감찰청장 강인수도 1000원을 기탁했다. 응원경관대가 1000원을, 4월 11일에는 김녕주재 전남응원대 경찰관 1명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200원을 신문사에 전달하고 사라지기도 하였다.

광주에 사는 제주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광주제우회에서 2만3025원을, 서울제우회에서는 5만원을 모아 보내오기도 했다. 마감기한을 연기하면서 그 해 6월에는 조위금 모금총액이 31만7000여원에 이르렀다. 그것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 당시 백미 1석의 값이 1700원이었다. 이 같은 제주지역의 움직임은 조병옥이 단정하던 정당방위론이나 북조선 연계 운운을 무색케하는 다른 분위기였다.

제주신보를 탈취한 서북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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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우주의자와 서북청년단.
‘경무부에서는 제주도에서 발행하는 제주신보사에서 송신기를 비밀히에 두고 무전송신 하였다고 하여 이를 차압하였다 한다. 동사에 있는 송신기를 사용금지하는 동시 봉인을 하고 27일 이를 체신부에 통지하였다 한다.’-독립신보 1948년 4월 28일

‘전번 제주도경찰청 특별수사대에 검속되어 8월 1일 송청된 제주신보 기자를 비롯한 관재처 북국민학교 제주측후소 직원등 16명은 5일 벌금형 최고 1만원으로 전원 석방되었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11일

‘초대사장 박경훈(朴景勳)군의 손으로 발간되었던 제주도 유일의 일간지 제주신보는 4월 3일 사건으로 작래(昨來) 이래 휴간 중이던 바 진용을 개비(改備)하여 신 사장에 김재능(金在能)군이 취임하여 지난 2월 중순부터 복간하였는데 한국일보 모 군이 4월 1개월을 후원하고 온 후 편집 약체에 곤란을 받고 있다 한다.’-비판신문 1949년 5월 30일

1948년 12월 말경 서북청년단은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했다. 서청이 제주신보를 접수한 시기는 2연대 주둔기인 1949년 2월 초순경이며, 김호진의 뒤를 이어 김용수(金用洙)가 편집국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서북청년단이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하는 과정에서 신문사 강제접수에 강력히 항의했던 김석호 사장은 김재능 등에 의해 업무국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뜨려지는 등 무수한 폭행을 당했다.

또 1949년 초 2연대 2대대의 주도 아래 서북청년회와 경찰 등이 총동원된 봉개리 작전이 있었는데, 이때 많은 주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언론이 ‘정당의 군사적전’으로 제대로 다루어야 했는데도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아 그를 구타하고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김용수 편집국장도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새벽 2시께 서청대원들에게 끌려갔다. 서청 사무실에는 김재능 단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인 김재능은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콧수염을 길렀고 긴 가죽장화를 신고 다녔다. 그는 워낙 악명이 높아 큰 키에 휘적휘적 걸어다니는 모습만 봐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는 무조건 김용수를 구타했다.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김용수가 초주검이 되자 일단 경찰서 유치장에 가뒀다.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이 김용수를 구출하고, 2연대에서는 김용수에게 군복을 입히고 선무공작을 하도록 지시했다.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한 김재능은 사장 자리에 올랐고, 김묵(金黙)을 편집국장에 앉혔다. 후에 영화감독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묵은 서청 특별중대원으로 성산포에 근무하고 있었다. 1949년 7월 8일자 제주신보를 보면, 제호 밑에는 편집국장 명칭도 없이 발행인․편집인으로 ‘김재능’의 이름만이 적혀 있다. 뿐만이 아니었다. 서청이 신문사를 탈취하기 얼마 전에 전남 목포에 특파되었던 김삼규(金三奎) 기자가 목포 서청단원에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가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1949년 10월 12일 계엄령이 해제되자 김석호 사장이 법에 호소한 경영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때 이러한 사실을 들어 제주법원에 제소, 서청의 불법 부당성을 주장했다. 그들은 창간 이후부터 1949년까지의 일체의 서류들과 신문일체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제주언론사에 큰 공백을 야기하게 됐다. 

서북청년회로부터 경영권을 회복한 김석호는 경영진의 보강을 서둘렀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편집국장 김용수를 비롯해 고영일(高瀛一)·방기옥(方基玉) 등이 인천상륙작전에 종군기자로 특파하기도 했다. 그리고 피난 언론인들 중 곽복산(郭福山)을 편집국장으로, 오재동(吳在東)을 논설위원으로 영입하였으며, 언론인 홍종인(洪鍾仁)과 중견작가 계용묵(桂鎔黙)은 신문사를 자주 드나들며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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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북청년단의 만행.
1·4후퇴로 정국의 추이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선포됐다. 제주지구계엄사령부는 제주신보의 경영권 인도를 요구해왔다. 그것은 서북청년단 이후의 두 번째 시련이었다. 제주지역계엄사령관은 해군 대령 남상휘(南相徽)이었다. 계엄사령부는 이에 반발하는 김석호 사장과 신두방 전무를 구속하고 1951년 1월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했다. 계엄당국은 사장에 홍순재(洪淳宰), 폅집국장에 곽복산(郭福山)을 임명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만인 2월 9일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제주신보를 되찾을 수 있었다.  

‘신빙할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김재능씨는 강원도에서 모직에 취직하려고 이력서를 제출한 바 동 이력서에 제주신보사 사장 및 서청 제주도위원장을 지냈다는 사실을 기재하였으므로 강원도경찰국에서 본도에 신원조회를 하였던 것이 수상의 단서가 된 것이라 한다.’-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전 제주신보 사장 및 서북청년단 본도 위원장이었던 김재능(金在能)씨는 경찰에 피검되어 현재 국 수사과에서 구속 문초중에 있다. 그런데 씨(氏)의 표면적인 죄명은 사기공갈, 상해, 사문서위조 등 단순한 혐의 밑에서 입건수사되어 왔던 것이나 본도 각면(各面) 각리(各里)를 막론하고 30만 도민 거의 전부가 김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부인못할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인 한 설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씨계통(金氏系統)에 의하여 애매하게 살해되고 상해되며 재산을 강탈되었던 수십명 내지 수백명의 가족들은 지금도 얼른 김씨에 대하여 보복적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왜냐! 공포는 남아 있다! 본도 유지 수명이 배후조종 호(乎) 당시 행정의 수반자라고 할 만한 지위에 있었고 직접 피해된 한 유지는 만약 경찰이 철저적인 수사를 가하여 법의 삼엄성을 보인다면 대다수의 제주도민은 이에 호응하여 김씨 수사에 대한 재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제주도민들이 김씨 수사에 자진적으로 재료를 제공하지 않은 이유에 언급하여 그것은 시간의 경과에도 다소의 원인은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김씨가 쉬이 석방되어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위구를 느끼고 있기 까닭이며 그 배후를 조종하던 숨은 세력이 아직도 도량하고 있다는 데 유인(由因)한다고 말했다. 동씨(同氏)는 본도 유지 몇 사람이 김씨 배후에 숨어 4․3사건 당시 도민을 살육의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닐까 하는 중대한 의옥(疑獄)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김씨 자신이 제주도 유지 몇 사람한테 조종당했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하였다.’-영주시보 1954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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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제주신보사 직원들과 해병제주경비사령관 장교들.

4·3의 고통을 짊어지고 국회로

‘경찰은 4월 2일 상오 10시 마지막 잔비 오원권을 생포했다. 1948년 이래 계속 출몰하면서 부락을 습격하고 살인, 방화, 약탈 그리고 양민 납치학살을 일삼아 전 제주민을 암흑과 불란 속에  몰아넣은 43사건의 여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경찰기록을 더듬어 보면 공비수가 1만6900명에 달하였으며, 그 중 7893명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고, 2천여 명이 귀순, 7천여 명이 생포되었다. 128명의 경찰이 전사했고, 89명의 군인이 전사했으며 군경 146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비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은 공무원을 포함하여 1300여명에 이른다.’-제주신보 1957년 4월 4일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에는 1947년 3월 1일을 4·3사건의 시발점으로,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된 1954년 9월 21일을 4·3사건의 종결시점으로 잡고 있다. 그렇지만 한라산 토벌작전은 지속되고 있었다. 무장대 세력은 한국전쟁이 휴전 후 만 4년 동안이나 상존했다. 김석호도 제주사회의 중심부에서 언론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1954년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됐다. 제주신보는 그 동안 이승만 정권의 폭거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언론에 대한 물리적 경제적 압력을 겪으면서 잘 견뎌왔다. 4·3사건의 와중에서도 김석호는 선거출마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국회의원 출마가 곧 언론사를 위하고 살리는 길이기에 출마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평소의 소신대로 정당 선택 없는 무소속이었고, 선거구는 북제주군 갑구였다. 시중의 여론은 그에 대한 지지도가 압도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경찰은 물론 자유당, 국민회, 방계 어용(御用)단체로부터 큰 저항을 받은 사람은 언론인 김석호였다. 

결국 김석호는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국외 등원 1년 만에 제주의 현안이던 제주읍의 시(市)승격 법률안을 발의해, 제77차 정기회의에서 제적의원 129명 중 101명의 찬상표로 통과시키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그러나 제주시 승격으로 인한 기쁨도 잠시였다. 정부와 여당이 제주도를 전라남도에 예속시키려는 이른바 폐도안(廢道案)이 제기된 것이다. 정부 당국이 극비리에 마련한 폐도안을 맨 먼저 탐지한 것은 김석호였다. 1956년 8월초였다.

김석호 의원은 국회 정책위심의위원회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제주도와 제주신보에 이와 같은 사실을 급히 알렸다. 제주신보는 즉각 8월 7일자 신문에서 이런 사실을 톱기사로 다뤘다. ‘본도에 중대한 국면’이라는 주제목과 ‘정부기구 간소화 안에 전라남도 예속, 자유당정책위에 회부 중’이라는 부제목 아래 그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도민들은 크게 분노하고 총궐기하여 폐도안 반대 궐기대회를 열고, 정부 당국에 강력히 항의하게 됐다. 각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도제폐지 반대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도민궐기대회가 연일 개최됐다. 결국, 도민들의 열화와 같은 진정과 전도민적인 저항이 예상 외로 강경하자, 국회상위위원회에서도 폐도안을 부결시키기에 이른다. 

1959년 9월 21일 의정활동을 마감하고 다시 사장에 취임한 김석호는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상태였다. 1960년 3월 11일 신문사 중역회의는 김석호 사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김두진 국회의원이 인수하기에 이른다. 신병으로 요양 중이던 그는 끝내 병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니 그 때가 1960년 8월 4일 상오 6시였다. 해은(海隱) 김석호, 일제 치하에서 유소년 청장년기를 보내고, 해방 이후 제주신보를 이끌었던 그의 인생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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