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고독한 예술가 삶 살다간 인물, 100주년 맞아 각종 행사

올해 이중섭(1916-1956)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 사망한 지도 60년이 된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일본인 아내와 자식을 두고 예술이라는 지독히 고독한 세계를 추구했던 이중섭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외로웠던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 예술가 중에서도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이다. 마치 잘 쓰여진 드라마처럼 순수한 영혼이 고난의 삶 속에서 꽃피운 예술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해방 전까지 그는 20세기 한국의 엘리트 화가의 전형을 살았다. 평양 인근의 평원에서 태어난 그는 오산학교에서 임용련의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의 저명한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와 예일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유학파이자 이후 파리에서 장학금으로 체류했던 선구자였다. 유학파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중섭도 일본 유학에 오른다. 김환기, 김병기처럼 당대 엘리트 작가들처럼 서구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배운 일본인 선생아래서 공부를 했고, 일본학생들과 교류하며 예술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그렇게 만난 여학생과 사랑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마사코라는 일본명 대신에 남덕이라는 이름으로 부인을 부를 만큼 사랑했고, 소에 미쳐 소만 그리던 시절도 있었다. 사랑과 예술로 충만한 순수의 시대였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조국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미국, 소련 등 강대국 사이에서 줄을 타야했다. 이념 갈등과 전쟁이 이어지면서 사랑과 예술의 시절은 곧 가난과 배고픔의 시간으로 변했다. 6.25가 발발한 후 잠시 전쟁을 피해 왔던 서귀포는 그가 가족을 지키고자 온 곳이었다. 그러나 결국 두 아들과 부인을 모두 일본으로 보낸 그는 혼자 쓸쓸하게 임종을 맞았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피우던 담배갑 내지인 은지에 펜으로 끄적거린 아이들 그림을 보면 아픈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아이들을 그리워했는지 보여준다. 

이중섭은 근대 한국이 낳은 비극적 예술가이다. 근대 한국이 ‘미술’이라는 서구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미술가’라는 신종 직업군을 만들어갈 때, 감수성 예민한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길을 향해 갔다. 예술가의 자유와 이상을 믿었고, 파리의 거장들 피카소, 마티스의 신화를 믿었다. 그리고 붓과 펜을 움직이면서 형상을 만들어내는 고독한 삶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근대 예술가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중섭의 그림은 가지고 싶은 욕망의 물건이 되었다. 인기작가다 보니 위작 논쟁이 종종 불거지고, 그의 유족도 이 논쟁에 말려들곤 한다. 이중섭의 예술과 인생 이야기도 이미 단순한 울림을 넘어 문화산업이 됐다. 

부산에는 ‘이중섭의 범일동 풍경’이라는 주제로 3년 동안 살았던 그와 마사코의 흔적을 기리는 길과 전망대가 사람들을 반긴다. 그가 2년간 작업했던 통영에도 그를 기리는 거리가 만들어졌다. 2002년 서귀포에 이중섭미술관이 건립돼 그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장소로 자리를 잡았다. 소장품이 많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벌써 누적관객 25만명에 육박한다. 1951년 1년 여간 그가 체류했던 서귀포가 발빠르게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집을 복원하며 신화를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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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여름 이중섭미술관의 모습.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이중섭미술관이 연 창작스튜디오는 젊은 작가들이 몰리는 공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이중섭미술관에 인접한 이중섭거리는 제주에서 가장 활발한 예술의 거리이다. 날씨 좋은 날 이 길을 걷다보면 이중섭 못지않게 창작욕이 넘치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자신이 만든 것을 파는 모습을 보게 된다. 평양에서 도쿄, 서울, 부산을 거쳐 서귀포까지 온 이중섭의 희노애락의 여정은 서귀포에서 해피 엔딩을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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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 거리 오른쪽 큰 건물이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이다. 사진=양은희. ⓒ제주의소리
올해 6월에는 서울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 6월부터 이중섭의 작품을 모은 대형기획전을 연다고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서귀포시도 창작 오페라타와 학술심포지엄을 계획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린다. 이중섭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중이라고 한다. 올 한해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간 예술가의 삶에서 인생의 희노애락과 함께 예술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 같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가 다가올 미래에 어떻게 해석될까? 통일이 되면, 이중섭을 기리는 문화산업도 바뀔 것이다. 그의 고향 평안남도 평원 역시 이중섭 미술관을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그가 활동했던 평양, 부인과 살았던 원산도 그의 유산을 탐낼지 모르겠다. 고향과 임시 체류지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자격이 있는지 운운할 지도 모른다. 이미 한국과 일본의 국경을 넘어 예술의 힘을 보여준 그가 한반도를 잇는 가교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이중섭을 기리기 위해 제주와 평양, 원산, 부산 등 그가 거쳐 간 도시의 문화행정가들이 모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은 바로 예술혼이 이념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날이 될 것이다.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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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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