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④ 고미카와 준페이의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잇북) / 장이지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 1916~1995)의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오족협화(五族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이상으로 내건 괴뢰국 만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철회사 조사부의 ‘가지’는 태평양전쟁의 전선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는 와중에 소집면제를 약속 받고 라오후링 광업소의 노무관리자로 전임한다. 그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광부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믿는다. 헌병대에서 인계 받은 만주인 포로 특수광부들에 대해서도 그는 그들을 ‘인간’으로서 대우하고자 한다. 그러나 특수광부들의 뿌리깊은 민족적 불신과 일본인 현장 관리자들의 타성으로 인해 그의 노력은 번번이 무위로 돌아간다. 특수광부들은 자유를 찾아 고난뿐인 바깥세상으로 삼삼오오 탈출하고 ‘가지’는 그들을 비호하다가 보충병으로 징집되어 관동군 국경부대에 배속된다.

라오후링에서의 일로 요주의 인물이라는 낙인이 찍힌 ‘가지’는 간부들과 고참병들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힘든 내무생활을 꿋꿋이 이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의 잔악성에 물든 고참병들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목도한다. 그는 좌익 사상범 친형을 둔 탓에 역시 요주의 인물이 된 ‘신조’ 일등병을 의지한다. 그러나 ‘신조’는 약속의 땅인 소련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살인적인 늪지대가 펼쳐진 국경 너머로 탈주한다. ‘신조’를 돕기 위해 늪지대로 뛰어들었다가 병에 걸린 ‘가지’는 병원으로 후송되고 그의 부대는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되어 전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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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대하소설 『인간의 조건』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 존엄성의 의미를 묻고 있다.

‘가지’는 또 다른 국경 진지인 칭윈타이에 전속된다. 그곳에서 그는 소위가 된 친구 ‘가게야마’의 비호 속에서 소총반 초년병 56명의 조수가 되어 다시 고참병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도 보람 없이 소련군의 참전으로 칭윈타이의 관동군은 괴멸된다. 그는 소령인 아버지를 둔 일본 군국주의의 씨앗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생존 초년병 ‘데라다’와 함께 사선을 넘어 탈주한다.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그들은 자유를 찾아 ‘집’으로의 귀환을 서둔다. ‘가지’는 도중에 만난 패잔병들과 민간인들의 리더가 된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중국인 토벌대에 쫓기게 된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잔악한 짓을 일삼는 관동군 패잔병들과 조우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아와 질병, 죽음이다.

‘가지’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전선에서 벗어나지만 결국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가지’는 자신의 후임병 ‘데라다’가 고된 노역과 질병의 후유증으로 죽자 그를 죽음으로 내몬 ‘기리하라’를 살해하고 다시 탈주한다. 그는 아내인 ‘미치코’에게 돌아가기 위해 끝없이 걷는다. 그러나 길은 끝이 없고 죽음의 눈이 내려 그를 길에 묻는다.

『인간의 조건』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 존엄성의 의미를 묻는다. 군국주의의 첨병으로서 만주에 온 일본인들은 민족적 우월감에 젖어 있다. 특수광부들의 리더인 ‘왕시양리’가 ‘가지’에게서 어렵게 얻은 종이 위에 기술한 것처럼 이민족들에 대한 군국주의자들의 압제와 학대는 형언할 수 없는 성격의 악이다. 그리고 그들은 엄청난 전류가 흐르는 철책을 두르고 포로들을 그 안에 가둔다. ‘가지’는 차선으로서 그 철책 안에서의 권리를 포로들에게 주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전시 하에서는 용인되지 않는다. ‘가지’는 포로들의 믿음을 얻지 못한다. 그는 가난 때문에 동족을 등지고 부일(附日)하는 심복 ‘첸’의 뺨을 때리고, ‘첸’을 죽음으로 내몬다. ‘왕시양리’는 ‘가지’에게 왜 무리를 지어 싸우지 않는지 묻는다. ‘가지’의 싸움은 관념적인 선의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만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그의 노력은 광산의 증산계획에 이바지하는 형태로 전쟁에 복무하는 결과를 낳는 데 그친다.

그것은 국경경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유능한 소총수로서 전장에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소련군 보초를 죽인 이후로,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어쩌면 피할 수도 있는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인간의 길을 걷고자 하지만, 그는 오히려 점점 더 짐승의 길을 걷게 된다. 전쟁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편승하여 인간의 저열함을 끝 간 데 없이 보여준 군인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생존욕구에 지배당한다.

‘가지’는 타인의 인권을 수호하고 그들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고자 한다. 특수광부, 소총반 초년병, 그리고 귀환 민간인과 소련군의 포로가 된 패잔병 들을 그는 지키고자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마지막으로 ‘데라다’가 죽자 그는 겨울이 도래한 만주의 허허벌판으로 자살행위와도 같은 탈주를 감행한다.

『인간의 조건』은 전후 ‘귀환’과 그 ‘수난’을 사실적으로, 그러나 때로는 감상적인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포로가 되어 수용소의 일상을 현미경과 같은 엄밀한 시선으로 관찰한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의 『포로기』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패잔병들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식인’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중심에 둔 오오카 쇼헤이의 『들불』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것은 두 작가가 태평양전쟁의 드넓은 전선 중에서 북방과 남방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서 기인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조건』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각축하고 있던 중국 전선의 역사적 특수성을 잘 이용하고 있다. 반공을 기치로 국민당과의 야합을 꿈꾸었던 일본 군국주의 욕망의 찌꺼기 같은 것들도 여기에는 잘 묘사되어 있다.

고미카와 준페이는 끝까지 인간이고자 하는 주인공, 자신의 격정으로 인해 끝없이 고뇌하는 햄릿형의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다. ‘왕시양리’, ‘신조’, ‘단게’와 같은 자신의 신념에서 움직이는 지식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격정은 이념적으로 고양되기도 하고, 아내 ‘미치코’와의 대화를 통해 그 격정은 가족의 안정감 속으로 일시적이나마 녹아들기도 한다. 『인간의 조건』의 소설적인 재미의 반분은 이 대화의 구도에서 발생한다.

전후 일본의 독자들은 『인간의 조건』을 읽고 많이 울었다.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고 일본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오독이다. 만주, 그리고 조선 반도에서 귀환한, 혹은 귀환하지 못한 일본인들의 수난사는 얼마간 일본인들이 스스로 뿌린 씨앗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인들의 수난은 없었다고 해서도 안 된다. 전쟁은 모든 인간들을 망친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동족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동족을 전쟁에 팔아넘긴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은 종종 잊고 싶어 하지만 그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인간의 조건』에는 중국인 포로들을 탈출시킨 뒤 다른 광산으로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조선인 브로커도 있고, 어머니에게 만두를 가져다주기 위해 동족을 위험에 처하게 한 중국인도 등장한다. 사악한 일본인은 더 많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물론 허구지만, 때로 역사가 누락한 진실이 허구에 깃들기도 한다.

『인간의 조건』의 작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묘사한다. 그는 민족을 초월한 더 높은 차원의 보편적인 인간을 그리고자 한다. 그는 인간되기의 고단함을 토로한다. 전쟁은 끝났고 역사는 자꾸 앞으로 나아간다. 그 후로 반세기가 넘게 흘렀지만 그 ‘되기’의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전쟁조차 아직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며, 그 전쟁의 폐해가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순결한 눈으로 덮인 ‘가지’의 무덤을 찾아내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 인간을 찾기 위한 집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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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이지 교수

시인. 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김구용시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 수상

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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