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홍의 세상 사는 이야기 ㊲>

보도에 따르면 술 마시는 책방(책바: Book+Bar)이 서울 마포구·서대문구를 중심으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 한다. 한 직장인은 “퇴근 후 집에 들어가긴 아쉽고, 그렇다고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싶진 않은 날 이곳을 찾는다. 술과 책은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했다. 책방 주인은 “위스키를 마시면서 살짝 취한 상태로 시를 읽고 가벼운 맥주를 마시면서는 소설을 읽으라”고 추천(?)한다.

책바의 등장은 몇 가지 점에서 기성의 사고체계를 뒤집는다. ‘술은 여럿이 어울려서 취하게 마시는 것’, ‘술은 독서 같은 정신활동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 ‘서점은 단지 책이라는 상품을 파는 곳’… 등등의 사고방식에 반기를 든다. 그런데 술과 책의 조합을 뛰어넘는 ‘술의 효용’을 일찍이 간파한 건 2500여년 전의 페르시아인들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 페르시아인들은 가장 중요한 안건을 술에 취해 토의하는 습관이 있었다. 다음 날 술이 깨면 그 안건을 다시 상정한다. 그리고 술이 깨어서도 참석자들이 동의하면 그 안을 실행하고, 부결되면 폐기한다. 맑은 정신으로 미리 상의한 안건은 술 취한 상태에서 다시 논의한다.

왜 이랬나? 페르시아인들은 모두 멍청이거나 주정뱅이였을까? 아니다. 한때 대제국을 건설했던 그들이다. 과학적 견지에서 술은 작동기억을 감소시켜 집중력이 떨어지게 한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이 무뎌진다. 이것이 창조적 사고에는 더 좋은 환경을 만든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7일 때 특히 문제해결에 창조적인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취할락 말락 알딸딸한 상태가 창의성이 꽃 피는 지점이라는 거다.

나는 40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각종 회의에 좇아다녔지만 뛰어난 아이디어를 가진 공무원을 만난 기억이 별로 없다. 크고 작은 기업체에서 숱하게 기획회의를 하지만 맨날 ‘커피 타임’만 하니까 아이디어가 잘 안 나오는 거다. 제주 속담에 “풀숲에 있는 꿩은 사냥개가 몰아내고 오장에 있는 말은 술이 몰아낸다”는 게 있다. 내성적인 사람도 술이 들어가면 용기가 생겨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옛날 동양의 문인들은 측상·침상·마상(변소·잠자리·말 위)에서 불현듯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랐는데 실은 이것도 술 마셨을 때와 같은 편안한 마음의 상황이 조성된 탓이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무능한 상사는 마른 나무에 물 짜듯 상상력이 부족한 부하들을 닦달해봤자 말짱 꽝이다.

지금까지 술의 효용에 대해 말했지만, 술의 해악도 언급해야 마땅하다. 한때 이런 구호가 있었지. ‘술은 인류의 적, 마셔서 없애자’, ‘술 중에서 가장 맛있는 술이 입술’이라는 우스개도 있지만 ‘술은 모든 범죄의 아비, 온갖 혐오스러운 것의 어미’, ‘악마가 사람을 찾아다니기 바쁠 때 대신 보내는 게 술’이란 말도 있다.

월하미인(月下美人)이 있듯이 취중미인이란 술 마시면 여자들이 다 섹시해 보이는 현상인데, 술기운이 돌면 짝짓기 욕구가 불같이 일어나서 완전히 곤드라질 때까지 그칠 줄 모른다. 그래서 ‘술은 인간의 불을 끄고 짐승의 불을 켠다’고 하는 거다.(나는 술은 이성의 불을 끄고 감성의 불을 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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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일홍 극작가.
세상사 모든 게 과유불급이다. 술도 적당히 마셔야 보약이지 지나치면 독이 된다. 나의 주력(酒歷)은 올해로 50년에 달하는데, 내가 마신 술을 드럼통에 담아 진열하면 족히 축구장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그뿐이랴, 만취해서 일어난 사건과 사고는 수주 변영로의 「명정 40년」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바슐라르는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아마도 거대한 도서관일 것”이라면서 독서에 대한 갈증과 갈망을 드러냈지만 나는 “천국은 분명히 있고, 그곳은 아마도 실컷 마시고 맘껏 읽는 책바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 장일홍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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