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⑥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의  『뉴캐피털리즘』(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 / 서영표 

지난번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사회학의 쓸모』를 소개하면서 우리 시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어떤 사회든 완벽할 수 없기에 정체되지 않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네가 살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지도 않고 인간답지도 않다는 것에 있다. 물론 ‘자연스럽다’나 ‘인간답다’는 말 자체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는 있다. 누군가에게는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아래’ 사람들이 그들의 분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일 게다. 어떤 이에게는 남녀가 만나 가족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편견이며 그러한 편견을 강제하는 사회적 통념을 폭력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이 엇갈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가 동의하는 인간다운 삶은 있다. 1948년 12월 10일 발표된 <세계인권선언>이 담고 있는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할 권리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넘어 현대사회가 동의하고 있는 인간다움의 최저선을 제시한다. 인종, 종교, 국적, 성별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으며 노동할 수 있는 권리와 생계를 보장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인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최소한’은 너무나 멀리 있어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존중되기 보다는 기업의 이윤창출, 국가의 경쟁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경제행위란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육체적 능력을 재생산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경제활동의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경제는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독립해서 사람들에게 군림한다. 한국은행과 경제 전문 연구소들이 발표하는 숫자로만 표시되는 경제를 위해 사람들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위치로 전락한다. 그걸 경제 ‘살리기’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고 죽이는 사회가 아닌가?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의 책 『뉴캐피털리즘』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제가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화’이니 세넷의 관심은 소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심성과 행위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있다. 보다 많은 자유와 선택, 그리고 다양성이 보장된다고 이야기되는 소비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를 무너뜨리고, 따라서 사람들을 파편화시키며 감시와 통제를 세련된 방식으로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 세넷의 진단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신뢰의 상실과 통제가 권력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 내면화된다는 것이다. 학교와 직장에서의 일상은 우리 모두를 경쟁적인 인간으로 훈육한다. 시민으로 동료 시민과 연대하기 보다는 투자자의 심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시민으로 국가에 참여하고 정당한 권리를 요청하기 보다는 고객으로 서비스를 요구할 뿐이다. 
▲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의 『뉴캐피털리즘』(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 위즈덤하우스. 번역 유병선.

우리들은 자기계발의 압박에 항상적으로 노출되지만 대부분 분절화 된 단순작업에 특화되고 구상과 통제는 고도화된 정보망에 의해 소수에게 집중된다. 언제나 누군가와 ‘접속’돼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혼자’일 수밖에 없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과잉된 정보는 오히려 우리들의 정보처리 능력(지식이라고 해보자!)을 마비시키고 얄팍한 이미지와 단편적 메시지에만 반응하도록 만든다. 바우만은 이것을 ‘훈련된 무능’이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매일의 일상을 통해 스며든 상품과 화폐의 논리는 행복하지 않은 처지를 모두 개인의 탓으로 돌리도록 한다. ‘열정’이 부족해서? 노력하지 않아서? 그래 결국은 모두 ‘내 탓이이야!’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들 마음 속 한 편에는 불만이 쌓여간다. 좌절과 분노. 하지만 이미 경쟁과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받드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를 내면화한 우리들은 좌절과 분노를 스스로를 향해 표출한다. 그 결과는 OECD 최고의 자살률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파괴의 에너지는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향한다. 외국인 혐오와 여성혐오가 만연한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 2016년 한국이라는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의 가장 큰 희생자들인 청년들은 그들을 패배자로 낙인찍고 경제적 도구로만 간주하는 권력구조에 저항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속한 사회적 약자들을 경멸의 대상으로 ‘소비’한다.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에서 경멸과 차별도 ‘즐거움’으로 포장되어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유머’라는 이름으로.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드러나는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사실을 그려지지만 그것 역시 소비될 뿐이다. 

정치는 이러한 문화 위에 기생한다. 정책이나 정치적 소신은 중요하지 않다. 서로 주고받는 속이 텅 빈 말들과 현란한 이미지들이 정치를 대체한다. 당연히 정치 집단들 사이의 차이를 찾기 어려워진다. 이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정치의 실종이지만 기득권세력에게는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안정적인 기반이다. 어쩌면 그들은 이렇게 정치혐오를 조장하고 정치적 무관심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다운’ 삶, ‘자연스러운’ 상태는 정치적 논란거리다. 정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인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찾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높은 기술력과 생산력 위에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단 하나의 논리, 즉 시장과 경쟁의 논리로 환원하고 그 외의 주장은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이제 ‘인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찾으려는 노력, 진정한 의미의 정치를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옆에 있는 사람을 경쟁자와 적대자가 아닌 연대해야 할 동료 시민으로 인식하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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