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⑦ 리처드 토이 《수사학》 노승영 옮김. 교유서가, 2015년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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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토이 <수사학> 노승영 옮김. 교유서가, 2015년 ⓒ제주의소리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는 사자성어와 얽힌 우리나라 전래동화 <별주부전>으로 글을 시작할까 한다. 아주 오래전 바다 속 용궁의 용왕이 큰 병이 들었다. 토끼의 간만이 용왕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처방이 내려졌다. 토끼라? 한평생 용궁에서만 살아온 신하들인지라 뭍은 어디고, 뭍에 사는 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른다. 그래도 신하들 중 누군가는 육지에 가서 토끼의 간을 구해 와야 할 터. 모든 신하들이 몸을 사리며 주저하는 사이, 늘 놀림만 당하던 거북이가 가겠다고 하니, 신하들은 당장 화공을 시켜 토끼를 그리게 했고, 거북이는 그 토끼그림을 가지고 육지로 떠났다. 육지에 와서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토끼를 찾아낸 거북! 그는 토끼에게 용궁에 가면 원하는 모든 벼슬을 얻게 해 준다며 달콤한 말로 토끼를 꼬드긴다. 토끼는 거북의 꼬임에 넘어가 용궁으로 간다. 그런데 이게 왠 날벼락!! 용궁의 용왕 앞에 끌려간 토끼는 그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육지에 간을 떼어 놓고 왔으니, 간을 가지러 다녀오겠노라 했다. 용왕 또한 이에 당황하여 서둘러 거북이를 시켜 토끼를 등 위에 태워 육지에 다녀오라 했다. 토끼는 육지에 당도하자마자 거북이 등 위에서 펄쩍 뛰어내려 그 길로 줄행랑을 쳐 위기를 모면했다는 게 이야기의 전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감언이설(甘言利說: 남의 비위를 맞추는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남을 꾀어 냄)’은 용왕의 충직한 신하 거북이가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한 말재주를 두고 나온 말이다. 그런데 토끼의 말재주로 통쾌한 반전이 펼쳐졌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그것이 만일 현실세계라면 임금의 명을 받은 거북이는 또 다른 카드로 토끼를 설득하고, 토끼는 거북이를 설득하는 상황들이 반복될 것이다. 이 우화는 당연히 말재주를 통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담았다. 생존, 이득, 충성, 소송, 화해, 사랑 등등 모든 삶은 서로와의 소통과 설득의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 소개할 책, 리처드 토이의 《수사학(Rhetoric)》(원서: 2013년, 노승영 옮김: 2015년)은 이러한 상황 속 우리네 ‘말재주’, ‘언변(言辯)’ 또는 ‘연설’의 묘미(논리)와 가치를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다루고 있어 자못 흥미롭다. 참고로 책 제목인 ‘수사학(修辭學)’은 라틴어에 뿌리를 둔 영어 ‘레토릭(Rhetoric)’에 해당하는데, 이는 서구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설득을 목적으로 한 ‘말재주’, ‘언변(言辯)’ 또는 ‘연설’ 그 자체인 동시에 그 이치를 연마하는 교과목이다. 필자가 중고교 시절 영어시간에 ‘레토릭(Rhetoric)=수사학’이라 달달 외던 시절에도 ‘수사학’이란 말이 우리말 치곤 너무 참 어렵고 낯설어 보였는데, 지금도 입에 달라붙지 않고 낯설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항간에는 ‘수사학’이라는 표현보다 그대로 ‘레토릭’이라 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쨌든 우리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말보다는 행동’ 또는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류의 격언을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말재주의 이치를 알고 연마하는 기술, 즉 수사학은 ‘인의(仁義)’ 전통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가당치도 않았다. 그런데 ‘수사학’을 둘러싼 부정적인 시각은 서구 사회에도 남아 있다고 저자 리처드 토이는 말한다. “우리 사회는 수사학을 대체로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얄팍하고 기만적인 언어와 동의어. 그러니까 ‘실제 내용’의 반대말이라고들 생각한다. 이 점에서는 아직까지도 플라톤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수사학이 논리적 대화의 적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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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화(woodcut) '수사학의 알레고리(1503년)' 수사학의 여인을 중심으로 시집을 든 베르길리우스, <수사학>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법전을 완성한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도덕책을 든 세네카, 역사책을 든 살루스티우스, 웅변가 키케로 등이 둘러싸여 있다. ⓒ제주의소리

당시 플라톤의 주요 공격 대상은 소피스트들(궤변론자들)이었다. 탁월함은 선천적이고 유전으로 전달되며 양육으로 강화된다는 귀족주의적 관점(플라톤-소크라테스)과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소피스트의 능력주의적 관점이 대립한 것이다. 여기서 “소피스트는 기존의 모든 가치에 의문을 던졌다. 하늘이 내린 불법의 법칙은 없으며 중요한 것은 인간의 경험뿐이라는 것”(19-20)이었다. 그러니까 말재주, 웅변 역시 그 비결을 깨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소피스트들은 장담했고, 그 서비스의 대가로 높은 수수료를 청구했다. 이 사태를 가만히 보고 있을 플라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플라톤이 문학적·수사적 대화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논증에서 약점을 감추고 적수인 소피스트에게 불리하도록 수를 쓴다는 점이다.”(25)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와서는 ‘수사학’이 학문적 뿌리를 내리고 로마의 키케로 시대에는 그 꽃을 피우며 서양 수사학이 발전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찌 보면 인류의 역사는 모든 인간 행위(말재주를 포함)를 둘러싼 귀족주의적 관점과 능력주의적 관점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위의 <별주부전>의 충직한 거북이와 지혜로운 토끼처럼, 누가 더 똑똑하고, 옳고,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영원히 미지수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준비하면서 이런 궁금증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양사상사에서 ‘수사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러니까 동양에도 ‘말하기’ 매뉴얼이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존재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 등등. 동시대 (B.C. 5세기경)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중국 노나라의 공자(孔子)의 말재주는 어떠했을까? 혼란기에 어진 군주를 찾아 전국을 주유하고, 귀향해서는 3천 제자를 거느렸다 할 정도였으니, 그에게도 ‘말’은 무기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E.카네티는 <말의 양심(良心)>에서 공자(孔子)는 능변을 싫어했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자(孔子)가 능변을 싫어하는 것은 선별된 말들의 무게 때문이다. 그는 가볍고 매끄러운 언어 사용으로 인해 말들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망설임과 신중, 말을 하기 전의 시간과 말하고 난 후의 시간도 함께 중요시된다. 간격을 두고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는 리듬에는 말의 가치를 높여 주는 중요한 면이 있다. 궤변가들의 재빠른 구변이나 열심히 주고받는 말의 유희를 그는 싫어한다. 재빠른 대답이 아니라 책임을 구하는 말의 침잠(沈潛)이 중시된다.” 
그러면서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 등과 같은 사상가들의 귀족주의적 관점의 수사학에 대항하여, 동시대 동양에서도 능력주의적 관점의 동양 소피스트들의 ‘수사학’ 역시 존재했으리란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귀곡자-鬼谷子 사상 등 참조).

다시, 이 책《수사학》으로 돌아오자. 책에서 말하는 현대수사학은 위와 같은 귀족주의적 관점과 능력주의적 관점을 넘나들고, 표현 도구로써 수사학과 분석 도구로서 수사학을 아우르는 중층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수사학은 언어적(시적) 맥락을 넘어서 사회적 맥락에서 수사학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옛 수사학과 다르다. 사실 자기 계발의 수단으로서 수사학 교재는 우리 주변에 넘쳐난다. 그런데 “오늘날 수사학 교재에서 내세우는 주장은 다소 과장되었다. (최근에 출간된 어떤 책에서는, 조언을 따르기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뜻대로 주무르고 어떤 집단이든 여러분의 목소리에 넘어오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한다).”(121) 

현대수사학 입장에서는 연설(언변, 담화)에 대해 교사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아 연설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고, 말하고자 하는 비슷한 주제에 대한 역사적 맥락(민족주의 수사학 전반)을 연설자 스스로가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면에, 청중 개개인도 연사가 구사하는 수사학을 통해 연설의 토대가 되는 사회의 가치를 들여다봄으로써 단순히 설득 당하지 않는 비판적 안목을 키워야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시민사회의 주춧돌이자 민주적 절차의 필수 요소로서 수사학의 중요성을 기저에 깔고 있다. “민주적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설득력 있는 공적 발언을 주고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신뢰와 사회적 결속을 다질 수 있다. 따라서 끊임없이 우리를 폭격하는 메시지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다면 수사학이 선인의 손에서든 악인의 손에서든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함으로써 모든 시민이 이익을 얻을 것이다.” (11~12)

큰 틀에서 보면 현대수사학은 지구적 통신 혁명과 따로 떼어 이해할 수 없다. TV가 독점하던 시대 때만 해도 정치인들의 TV 출연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텔레비전 PD가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려고 사용하는 편집 기법”(146)이 그 효과를 극대화 했다. “촌철살인의 어구가 텔레비전 뉴스 단신에 포착되도록 연설을 구성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146) 이런 식으로 지배 권력은 상징과 조작의 정치에 근거한 대중 정치, 즉 외양의 정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인터넷과 같은 전자매체의 세계화는 연설, 성명, 기자회견의 원본을 온라인으로 유포할 수 있게 되면서 음으로 양으로 연설가들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익명의 ‘다중적 청중’(133)을 상대해야 하니 말이다. ‘말은 한 사람의 입으로 나오지만 천 사람 만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정치인은 매순간 “당파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회장에 모인 열성 당원들을 열광시켜야한다. 게다가 부적절한 한마디가 국제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133) 이러한 파장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도, 위안부, 식민지 정책, 재일한국인,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 등등 한일 간 역사 문제를 국내적으로 발신했다가, 국제적으로 물의를 빚는 경우들 말이다. 여기서 저자는 “현대 수사학은 국제문제를 다루는 수단으로서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134)고 지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요즘 말로 투트랙, 쓰리트랙 연설전략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 정치심리학, 문화이론, 사회학, 경제학 등 여러 분야를 횡단하는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적 청중’의 반응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이 연설이다. 

한편, 전자 매체가 성장하면서 여론 조작의 힘에 대한 두려움과 (정치에서 소외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 대중의 탈정치화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저자는 정치학자 머리 애덜먼(Murry Edelman) 같은 비판자들이 현대매체를 “정치적 볼거리(political spectacle) 생산의 공모자”(152)라고 주장했다 하면서 정치의 ‘수사적 쇼’로의 전락 사례를 들고 있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경우, 종편(종합편성채널)의 정치 ‘썰전(舌戰)’과 같은 프로그램도 그 사례에 해당한다. 날마다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을 흥미 본위로 다루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이는 감히 말하건대 국민으로 하여금 신성한 정치 참여보다는 정치 소비를 암암리에 조장하고 있다 하겠다.

‘혀가 길면 손은 짧다(Long tongue, short hand. 말이 많으면 실행력이 적다는 뜻)’라는 영국 속담이 있는가 하면, ‘말이 살아 있는 한 그 국민은 죽지 않는다’는 체코슬로바키아 속담이 있다. 양쪽 다 일리 있어 보인다. 다만, 그 ‘말’의 의도와 가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어폐도 있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후자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말’이 공동체의 유산, 의례, 생존 기억, 가치관, 인류애 등등을 아우르는 것이라면, 그 말이 길건, 짧건, 글 수사학이건, 말 수사학이건 그리고 능변이건 눌변이건 엄청난 희망과 감동이 전해진다. 이 책이 말하는 현대수사학의 관점에서 인류 공동체가 생존하는 한, 말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형식에 있어서 ‘창조적 파괴’와 내용에 있어서 ‘영구 순환’(174)이 있을 뿐이다.

말은 겉보기에는 표현의 문제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가치의 핵심을 파고 든다. “어떻게 말하는가는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근거이자 사회, 정치, 도덕 전반을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수사학은 가능성이자 한계이기 때문에, 어떤 수사학을 동원하는가에서 그 사회가 어떤가를 알 수 있다.”(153-4)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주도는 어떤 상징과 비유로 외부에 전파되고 있으며, 그 상징과 비유 표현들엔 몇 겹의 사회, 정치, 도덕, 기억, 문화, 전통 전반을 입히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바로 이러한 그런 의미에서 필자에게 ‘글쓰기’, ‘말하기’는 늘 두렵고 낯설고 서툰 영역이다.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세계로서 말이다. 글 수사학, 말 수사학 자체가 시대적 변화와 새로운 위협 앞에서 스스로의 토대를 허물었다 쌓기를 반복하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이 책의 저자도 말하고 있지 않는가!!

 ▷ 고영자(미학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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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및 재일제주인센터 특별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대학원에서 미학(예술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소(EHESS) 연구원 역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 강사(미학) 역임.

현재, 근·현대 문화매체론, 제주미학론, 제주 ‘이미지’ 생성 및 변천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크리스틴 조디스 저《미얀마 산책》(2008년), 데이비드 네메스 저《제주 땅에 새겨진 신유가사상의 자취》(2012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1845~1926)》(2013년),《서양인들이 남긴 제주도 항해·탐사기(1787~1936)》(2014년), 《구한말 佛語·英語 문헌 속 제주도(1893~1913)》(2015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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