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 덜어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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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귤나무에 한창 가위질을 하고 있다. 봄을 맞은 첫번째 수행과제다. ⓒ 김연미

산고를 막 이겨낸 나무에게 가위를 댄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기도 전에 들이댄 가위질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 수확기를 놓쳐버린 열매 몇 개 가지에 매달려 있다. 추위에 동사해버린 것들은 아직 제 어미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애절한 눈빛을 보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농부의 생각은 오롯이 잘라낼 가지만을 찾고 있다.

살집만 부풀리는 가지들과 열매의 무게 때문에 제멋대로 휘어진 습관들을 잘라낸다. 햇살의 길을 방해하는 것, 양분에 욕심을 부려 다른 것들의 몫까지 빼앗을 수 있는 것, 작은 열매 하나 잉태하지 못하고 잉여의 가지로 남을 것들을 잘라낸다.

귤나무 중심에서 그 수세를 자랑하던 가지에 가위를 댄다. 너무 확장된 가지는 다른 가지들의 성장을 방해한다. 농부의 살뜰한 보호 아래 단단하게 자란 나뭇가지가 가위를 물고 놓지 않는다. 이대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농부의 손아귀에서 힘을 빼앗는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손을 놓는 가지. 툭 떨어진다. 굵은 가지 몇 개 잘라내고, 햇빛이 들어오는 양을 보면서 작은 가지를 다듬는 농부의 손길은 기계처럼 거침이 없다. 그 손놀림이 길어질수록 가벼워지는 나무.

가끔 내 몸에도 누군가 이런 가위질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대해진 욕심을 덜어내고, 군더더기 게으름을 잘라내고, 최소한의 양심과 최소한의 목숨으로 가볍게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나약한 지성으로 인해 비현실적으로 몸집만 부풀어버린 생각, 그 얼킨 가지들을 뚝뚝 잘라내어 내 몸 구석구석마다 부신 햇살을 들여 놓을 수 있다면 내 삶에도 작은 꽃 한송이 피어날 수 있으려니...

봄에 돋아날 새싹의 자리를 보전하면서 가지를 솎아나가는 전정은 숙련된 농부의 몫이다. 나처럼 어리숙한 초보 농부는 숙련자의 뒤에서 잘려진 가지나 치우는 게 상책.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가지들을 한 곳으로 주워 모으는 일은 힘들다.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게릴라의 총구처럼 손을 찌르는 가시들이 일을 방해한다. 어떤 일이건 초보자의 일은 숙련자의 그것보다 힘이 드는 가 보다. 그러나  내 손으로 직접 전정을 해보리란 속셈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전정이 일 년치 귤 수확량과 직결된다는 사실 앞에서 말이다.

봄은 세상만물이 다 분주한 계절이다. 일년동안의 노고를 농부에게 다 바친 귤나무를 위해 이제 농부는 일년을 나무에게 다 바쳐야 한다. 그 첫번째 수행과제 앞에서 농부의 손길은 쉴 새가 없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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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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