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놀이책 Q&A’로 책과 함께 즐겁게 노는 법을, ‘어부가’로 <논어>에 담긴 가족 생활의 지혜를 전하고 있는 오승주 작가가 이번에는 ‘그림책’을 펼쳐보입니다. ‘어린이와 부모를 이어주는 그림책(일명 어부책)’입니다. 그림책만큼 아이에 대해 오랫동안 관찰하고 고민하고 소통한 매체는 없을 것입니다. 재밌는 그림책 이야기와 함께 작가의 유년기 경험, 다양한 아이들과 가족을 경험한 이야기가 녹아 있는 ‘어부책’을 통해 어린이와 부모가 함께 즐기고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오승주의 어·부·책] (11) 그림책 편지-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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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미 (글), 김진화 (그림) | 웅진주니어 | 2011년 7월

언니, 오빠들이 저한테만 시켜서 짜증나요. 보일러 켜라고 하고, 빨래 개라고 하고, 설거지 하라고 하고, 리모컨 가져오라고 하고, 충전기 가져오라고 시켜요. 자기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나만 시켜요. - 제주,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

안OO 어린이 안녕하세요. 우선 반갑습니다. 저 역시 위에 누나가 두 명 있었거든요. 심부름을 지나치게 한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밤마다 누나들을 데리러 큰길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밤길은 무서웠죠. 누나나 형들은 시키는 게 버릇이 돼서 동생들의 설움을 모르죠. 학생처럼 오빠와 언니가 많으면 정말 피곤하겠어요.

그래도 작은 누나가 학교 끝나서 하교할 때나 큰누나가 퇴근해서 만날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누나가 격하게 팔짱을 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서 맛난 빵을 사갈 때 행복하죠. 나중에 누나들과 어머니가 저녁에 마중나간 일을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누군가는 알아줍니다. 그 노고를. 

<백만 년 동안 절대 말 안 해>(웅진주니어)라는 그림책은 제목만 봐도 위로가 됩니다. 안OO 어린이처럼 엄마랑 아빠, 언니에게 허구한 날 당하는 막내 여동생의 넋두리를 담고 있어요. 이 땅의 모든 동생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대변해주네요. 가족들을 버리고 떠나려고까지 심각하게 마음을 먹는다니까요! 그 순간 주인공은 이런 생각을 하죠. 자신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보일러 켜라, 빨래 개라, 설거지해라, 리모컨 가져와라, 충전기 가져와라 하고 심부름 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안OO 어린이가 있음으로 해서 가족들은 큰 힘을 얻고 있는 거죠.

가족이란 때로는 나의 든든한 울타리도 되어 주지만, 나를 가두는 감옥 같기도 해요. 그래서 가족이죠. 집이 감옥이라고 생각했던 적 없어요? 집이 감옥이라면 가족들은 ‘간수’가 되나요? 그림책에서 제 눈에 띄었던 것은 주인공이 들고 있었던 끈이었어요. 가족과 나는 어떤 끈으로 연결돼 있는지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 끈을 통해서 서로 만났고, 실컷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끈의 용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안OO 어린이와 언니, 오빠들이 어떤 끈으로 연결돼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가족들이 안OO 어린이에게 시시한 심부름을 시키는 습관이 한동안 계속될지 몰라요. 하지만 안OO 어린이가 가족과 연결된 끈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이해를 하게 된다면 관계는 달라질 거예요. 어쩌면 안OO 어린이가 시시하고 귀찮은 심부름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죠. 그 이유를 알게 된다면 저한테도 이야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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