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4) 부르고 싶지 않은 이름이여

▲ 과수원 전체를 점령한 괭이밥. ⓒ 김연미

시를 쓰고부터 ‘잡초’라는 단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 존재 이유가 있고, 그렇기에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하며,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걸 증명해 준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어 주었다는, 그래서 그 이름들과 눈을 맞추고 그들이 내게 걸어오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게 시인의 역할, 곧 나의 역할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잡초라는 이름 아래 무시된 존엄성을 찾기 위해 식물도감을 펼쳐가며 이름을 기억하고, 정확한 모양을 알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신기하게도 이름을 알게 되면 그들의 전하는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세상으로 뻗어있는 내 몸의 가시들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구나. 거기에 속해 있는 나도 그 아름다움의 일부가 될 수 있으려니... 그 생각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그러나 농부의 눈으로 바라보는 괭이밥의 뒷면.
어린 순에서 나는 새콤달콤한 맛과, 앙증스러운 노란 꽃, 세심한 바람에도 손을 흔들어주는 귀엽고 예쁘던 일면 너머,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줄기만으로도 하나의 개체를 형성해 가는 지긋지긋한 생명력, 여리디 여린 이파리로 위장을 하고, 지하에서는 끝을 알 수 없는 탐욕처럼 뿌리를 늘려 가는 괭이밥. 콩깍지처럼 생긴 열매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씨앗들의 비행은 어리숙한 농부를 얼마나 또 놀라게 하던가.

노랗게 익어가는 감귤마다 난데없이 깨알 같은 점이 생긴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병에 걸린 건 아닌가, 가지를 꺾어 들고 농협을 찾아 갔다. 그게 괭이밥 씨앗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건, 지면에 딱 달라붙어 자라는 괭이밥 씨앗이 그렇게 높은 곳까지 튀어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예전엔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이렇게도 무시무시한 존재였던가. 잠깐 방심하는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개체수를 늘려가며 과수원 전체를 점령해 버린 괭이밥.

제초제를 치면 된다고 귤나무 아래 양탄자 깔듯 늘어가는 대로 괭이밥을 놔 두었다. 이파리 파릇파릇할 때 제초제 한 방이면 다 끝날 거니까, 번식할 수 있을 때 맘껏 해 보라고... 그런데, 뿌리가 성한 식물은 제초제로도 제거하기 곤란하단다. 물론 뿌리를 죽이는 제초제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귤나무에도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결국 다 손으로 매는 수밖에...

무거워진 몸의 중심을 발목에 의지하고, 오리걸음으로 온 과수원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나잇살이라 우기는 두툼한 뱃살 때문에 쪼그려 앉기도 힘든데다, 자꾸 뒤로 넘어가는 엉덩이의 무게중심까지 발목으로 끌어오려니 김을 매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게 더 힘들었다. 거기다 스크럼 짜듯 서로 얽혀 있는 괭이밥의 뿌리는 양탄자 말듯이 떼어내야 했다. 괭이밥의 뿌리 한 끝을 잡고, 호미로 땅을 긁어가며 살살 말아 올리면 옷감처럼 짜여진 괭이밥 뿌리들이 흙과 함께 둘둘 말려 올라왔다. 

호미를 잡은 손아귀의 힘이 빠지고, 손목에서 부터 시작된 통증이 어깨 쪽으로 뻗쳐갈 때, 그리고 몸무게를 감당하느라 지친 발목의 통증이 지속될수록  괭이밥의 이름은 그냥 잡초로 돌아가 있었다. 내 과수원에서 뽑아내고 없애야 할, 존엄성도 대화의 상대도 아닌 그냥 잡초. 

뒤를 돌아본다. 패잔병처럼 처절하게 널브러진 잡초가 허연 뿌리를 드러낸 채  햇볕에 마르고 있다. 은근한 이 쾌감. 저렇게 많은 주검 앞에서 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니...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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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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