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⑪ 필립 맥마이클 『거대한 역설』/ 서영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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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립 맥마이클 『거대한 역설』조효제 옮김. 교양인. 2013.
 필립 맥마이클(Philip McMichael)의 『거대한 역설』의 부제는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이다. 20세기 중반을 관통하면서 사람들이 갖게 된 생각은 ‘개발(development)’은 ‘성장(growth)’이며 그것은 모두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리고 개발과 성장은 국민총생산(GNP)이나 국내총생산(GDP)으로 표시되며 그것을 국민의 수로 나눈 평균을 곧 삶의 수준이라고 생각해 왔다.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이 수치로 표현되는 ‘성장’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기에 독재정권조차 옹호할 수 있었다.

 이런 태도는 ‘성장지상주의’라고 불린다. ‘맹목적’이고 ‘돌진적’인 성장의 추구를 이르는 말이다. 성장의 의미와 가치를 되돌아보지 않고, 그것이 가져올 부정적인 효과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언제나 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다수의 희생이 필연적인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눈감았기에 맹목적이었다. 오직 ‘성장률’이 중요했고, ‘수출량’이 중요했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군사적인 방식을 통해 생산을 독려했기에 ‘돌진적’이었다. 수많은 ‘전태일’과 ‘YH여공들’, ‘태백의 광부들’, ‘함평의 농민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조영래가 『전태일 평전』을 통해 전해주고 있듯이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총량’으로만 표현되는 성장이 곧 사람들에게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성장을 위한 기계,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기계의 부품이 되기를 강요했던 ‘근대화’의 역설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 그리고 약간의 시차가 있기는 했지만 도래했던 민주적 절차의 회복은 돌진적이고 맹목적인 성장추구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는 듯 했다. 노동자의 권리와 복지가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당연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그런 논의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화가 정치인들의 결단과 타협에 의해 가능해진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지배세력은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성의 기회’는 곧 닫혀버렸다. 민주화는 정치권력을 독점한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의 손아귀로부터 시장의 원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등치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러한 시장맹신주의가 우리사회를 완전히 재편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한편에서는 ‘탈물질주의’와 ‘탈근대’가 언급되면 다양성과 정체성이 논의되었지만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맹목적 성장주의와 그에 따른 불평등은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국제관계를 전공하는 정치학자 필립 맥마이클이 개발을 ‘거대한’ 역설로 표현한 이유는 맹목적이고 돌진적인 성장주의가 민족국가 단위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전 지구적 현상임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일 게다. 전 지구적 현상이란 ‘근대화이론’이 약속했던 성장은 중심부(core)와 주변부(periphery)의 구조적 불평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은 곧 착취의 다른 표현이고 착취는 주변부라고 불리는 나라들의 노동과 자원을 쥐어짜내어 고갈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장의 결과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순간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윤’이 최대목적인 무한경쟁의 세계시장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채 굳어지기 전에 이미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끝없는 욕망의 창출과 선동으로 특징지어지며, 그래서 언제나 과잉생산과 과잉착취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저서로 국내에도 소개된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이 보여주었듯이 착취와 불평등은 주변부 국가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윌킨슨은 평등한 분배가 동반되지 않는 성장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하며 낮은 행복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해 보여주었다. 세계 최강의 국가이자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불평등한 나라 가운데 하나여서 다양한 사회적 문제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맥마이클이 지적한 전 지구적 현상으로서의 ‘거대한 역설’을 우리들 마음의 ‘작은 역설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으로 삼아 보자.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을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인간적인 모멸감조차 감내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이 성취하지 못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자식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엄청난 사명감으로 사교육에 몰두한다.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불행하다. 아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자 사회적 존재로서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인 놀이를 박탈당하고 ‘동물의 왕국’에서나 적용될 ‘우승열패’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영혼을 잠식당한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0%가 대학에 진학하는 ‘이상한’ 나라의 젊은이들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떠들어 대는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말하는 경쟁력을 위해 젊음을 소진하고 성장의 도구로 전락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들은 ‘아플’ 시간과 여유조차 없다. 어렵사리 취업을 한다 해도 비정규직이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 정규직이라고 나을 건 없다. 일하는 ‘기계들’은 아직 멀쩡할 때에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 사람의 몸은 자본이 투하된 적이 없기에 실제 기계처럼 마모될 때까지 사용될 이유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력의 원천인 몸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올라간다면 언제든지 폐기 처분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해고하기 쉬운 노동시장 ‘유연화’ 논리다. 

 그래도 번듯한 직장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퇴직금이라는 명목의 ‘위로금’이 전달된다. 이것이 거리를 가득 메운 식당과 편의점, 빵집과 카페가 생겨나게 되는 원인이다. 모두가 성공할 리가 없다.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면 결국 빚을 지게 된다. 누군가는 빚에 허덕이다 가정이 파탄 나고 노숙자가 되며 자살을 선택한다. 변변한 직장을 가지지 못해 연금이나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없지만 사회적 연대망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노인들도 빈곤에 내몰리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모두가 행복을 향해 돌진하지만 모두가 불행한 역설을 참고 견디는 것일까?      

 제주도는 ‘때늦은’ 성장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양적인 팽창만이 최고의 가치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태와 평화’가 제주도의 상징처럼 내세워지고 있지만 ‘생태적 가치’를 파괴하고 ‘평화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맹목적이고 돌진적인 성장주의가 섬 안에 가득하다. 이미 맹목과 돌진의 정도가 심해져 스스로가 하는 행위가 지금 당장 어떤 부정적 효과를 초래할지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버렸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산으로 하는 제주도를 이리저리 절단하는 도로와 그 위를 가득 매운 자동차, 경관을 사유화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 사업들, 제주의 환경이 견뎌내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제주의 독특함을 파괴할 수십 층에 이르는 고층건물들, 바닷가를 점령해가고 있는 낯선 외래어 간판을 단 카페들을 생각해 보라. 

 제주는 이미 지탱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수준을 넘어선 개발과 성장주의에 몸살을 앓고 있다. 분명 양적으로는 성장해가고 있다. 땅값과 집값은 오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관광객 수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질문해 보자. 도민들은 행복한가? 투자와 개발로 주머니를 채우는 개발업자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지방정부의 관료들과 정치인들(세금만 거두어들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은 만족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도민들은 행복하지 않다. 도민 개개인은 폭등하는 집값과 악화되어가는 교통체증, 파괴되어가는 자연경관과 사라져 가는 사회적 유대 때문에 고통 받고 있음에도 마치 도민 사회 전체가 맹목적인 성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소위 지식인과 정치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도민전체의 이해관계로 호도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지금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생태계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게 될 제2공항을 마치 도민 전체의 숙원 사업인 것처럼 떠벌리고 있다. 제2공항은 소수만이 나누어 가질 단기적 이익을 위해 제주가 지켜야 할 자연과 문화를 파괴하는, 양적인 팽창만을 고려한 채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효과는 고려하지 않는 ‘돌진적’이고 ‘맹목적’인 개발주의의 전형적인 사례가 아닐까? 

 도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제주도민은 맥마이클이 보여준 불평등한 개발의 반대편에 선 저항에 나서야하지 않을까? 제주의 지배엘리트들은 결코 말 할 수 없는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개발이 아닌) 발전을 직접 말해야만 한다. / 서영표 제주대 교수 
  

▷ 서영표 교수

사회학박사
사회학이론, 도시사회학, 환경사회학 전공
전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
현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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