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5) 한라봉꽃 솎아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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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봉꽃. ⓒ 김연미

4월, 성급한 계절이 봄의 계단을 얼렁뚱땅 넘어와 덜컥 여름의 문을 열어 제치는 시점. 한낮의 하우스 안은 한여름의 바깥 온도와 다를 바 없다. 그 시점에 맞추어 꽃을 솎아내는 작업도 시작된다. 

‘꽃을 딴다’는 어감에 담긴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 그 이미지만으로 시작은 늘 좋다. 초록색 이파리 사이사이 신부의 부케처럼 순결한 꽃망울이 아침 공기보다 더 신선하게 눈을 자극한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하우스 안을 가득 채우고, 거기서 하루쯤 일을 하다보면 내 몸에도 그 향기 진하게 배어 있으려니... 한다. 아직 이파리를 펼치지 못한 봉오리들이 아기주먹처럼 가지에 매달려 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 보따리를 꼭꼭 채운 채 언제 이 보따리를 풀어야 하나. 그 시점을 살피는 동안 보따리는 더욱더 부풀어 오르고, 그러다 어느 순간 툭 꽃잎이 벌어진다. 다섯 개의 하얀 꽃잎. 그 안에 숨어 있던 암술과 수술이 길게 기지개를 펴고, 제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는 듯 자세가 당당하다. 날마다 하우스 안은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채워지고 그 열기에 힘입어 꽃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걸어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꽃을 농부는 따내야 한다.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 꽃봉오리를 잡으면 마지막 저항처럼 단단한 알맹이가 손가락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허무하다. 꽃봉오리가 손가락에 닿자마자 낚아채듯이 휙 목을 비트는 순간 손가락에 힘을 뺀다. 어느새 바닥에 몸을 누인 꽃망울.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동그란 목숨들이 바닥에 하얗다.

백전백패, 백전백승의 승패율. 그러나 그 승패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꽃망울이 떨어지는 만큼 몸에선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꽃향기 대신 땀냄새가 온몸에 배어들었다. 하루 종일 서 있느라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휘어지고, 어깨와 팔 근육의 통증은 이미 마비 상태가 되었다.

팔자걸음 작은 보폭 귤꽃들을 따낸다
가지 하나에 꽃 하나 일직선 명제 앞에
잉여의 하얀 영혼들 별똥별로 내리고

상위 일 퍼센트 그 꽃들이 우선이야
과정도 사연도 없이 태생으로 결정되는
이 시대 상품의 가치 절벽처럼 단호해

위치를 파악하라 중산층 꽃눈 속에서
상처 깊을수록 향기 또한 진하리라는
진부한 구절 하나를 기둥처럼 붙잡는 이

능란한 손놀림이 목을 조여 오는 시간
완강히 등을 돌린 곁가지 꽃망울 하나
이파리 방어막 뒤에서 눈동자가 커진다.  -졸시 <한라봉 꽃 솎아내며>-

가지 하나에 꽃 하나만을 남겨야 한단다. 보통 마지막 꼭대기에 달린 꽃이 튼실하기 때문에 그것만 남기고 곁가지 꽃들은 다 따낸다. 하나를 위해 그 아래 달린 예닐곱 개 이상의 꽃들이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반복적인 동작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꽃들도 사람의 세상처럼 태생에 따라 생사가 갈리는 구나. 어디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이미 모든 운명이 결정되어 버리는... 상위 일 퍼센트가 아니면 모두 잉여물로 간주되어 언제 건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는 처지.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 아니던가. 그런 현실 속에서 나의 위치는 어떤가. 결코 상위 일 퍼센트가 될 수 없는, 그리고 그 일 퍼센트로의 신분이동도 불가능하다.  잉여물이 되어 폐기처분될 수도 있는 나의 위치를 파악하는 순간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의 좋은 상품을 위하여 나머지는 기꺼이 희생이라는 명예를 받들 수 있지 않느냐고 위안을 삼기엔 너무 억울하다.  방어막이라 할 수도 없는 이파리 뒤에서 완강하게 등을 돌려봐야 무지막지 하게 찾아 들어오는 손가락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위협을 감지하고 놀란 눈만 뜨고 있는 이 세상의 무수한 나의 얼굴이 떨어져 내리는 꽃망울 위로 오버랩 되었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쓰여진 시였다. 그렇게 또 하나의 잉여물을 쓰고 나서 생각이 복잡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써야 하는 것은 이런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한라봉 꽃은 여전히 아름답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모습에서 어디서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다는 일념이 느껴진다. 새순이 올라오는 머리끝에 이미 꽃망울을 달고 있다. 가지가 자라면서 팔자걸음처럼 잎이 나고 잎과 줄기 사이 다시 꽃망울 하나씩을 낸다. 순서로 따진다면 머리끝에 있는 꽃망울이 먼저 태어난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게 다른 꽃망울보다 훨씬 크다. 나

중에 열매가 되어도 더 튼실하게 자랄 것이기 때문에 수익을 생각하는 농부라면 당연히 그걸 살리는 게 정답이다. 그렇다고 머리 끝 꽃망울이 모두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곁가지 꽃망울이라고 해도 다 따버리는 것은 아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주어진 운명을 비껴가는 것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특히 나처럼 어리숙한 농부들의 손끝에서의 예외는 다른 농부들보다 더 많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주어진 운명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한들 미리 무릎 꿇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얼기설기 넝쿨을 뻗어가는 나의 머릿속과는 상관없이 하우스 안의 열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꽃들이 내뿜고 있는 생존욕구 때문이리라.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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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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