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세통Book世通, 제주읽기] ⑮ 스메들리 버틀러 『전쟁은 사기다』 권민 옮김/박경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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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은 사기다』스메들리 버틀러 지음, 권민 옮김. 공존 2013년.
4.13 총선을 앞둔 지난 2월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북한은 광명성 위성로켓)을 발사하자 우리 정부의 개성공단 철수, 북한의 폐쇄가 즉각 이루어지고, 군사외교 테이블의 아래에 잠겨 있던  고고도미사일방어시스템 사드 조기 배치론이 급부상하고, 국민안전처는 《비상시 국민행동요령》 책자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여기에 맞추어 여권지도부의 핵무장론, 새누리당 의원의 ‘전쟁불사론’ 등이 난무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지금 언제 그랬느냐는 식의 무풍지대다. 물론 이 모두는 당시 정국의 정치지형과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정치공학적 이벤트일 수도 있다. 하지만 6.25한국전쟁을 겪은 바 있는 우리들에게 전쟁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될 봉인된 금기의 참상이란 점에서 총선을 앞두고 너무나 안이하게 정치쇼로 몰아가지 않았나 싶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여전히 휴전국가라는 점에서 전쟁은 우리사회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공포적 요소다. 그럼에도 북한과의 갈등국면마다 전쟁불사론이 나오는 것은 전쟁에 대한 우리들의 사려 깊지 못한 인식의 한계인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전쟁은 더 복합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전쟁의 본질을,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전쟁의 본질을 명쾌하게 꿰뚫는 선명한 시선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한 책이다. 전체 144쪽 중 추천사가 20쪽, 번역자의 서문이 45쪽, 책 후미에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가 20쪽, 정작 본문은 58쪽 밖에 안되는 작은 책자다. 어찌 보면 팸플릿과 같은 분량인데, 사실 이 책은 저자가 1930년대 당시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연설했던 원고를 모아 만든 것이기에 분량의 부담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이 책이 얇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과 메시지마저 얇은 것은 결코 아님을 이 책을 읽고 나면 반드시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특히 감명 깊은 것은 정작 저자의 문맥으로 들어가기 이전, 추천사를 쓴 ‘신디 시한(Cindy Lee Miller Sheehan)’의 글이다. 그녀는 2005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소유의 미 텍사스주 크로퍼드 목장 인근에서 철야시위를 벌여 ‘반전엄마’로 널리 알려지면서 미국의 대이라크 반전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시한은 “나는 하느님을 원망했다. 내 아들 케이시가 입대하기 전에 왜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하지 않았느냐고! 그 때 내가 이 책을 읽기만 했었어도 지금 케이시는 살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군산복합체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할 이유가 나와 있다.(그녀의 아들 케이시는 2004년 4월 4일 이라크 전쟁에서 전사했다.)” 

1935년에 발간된 이 책은 저자인 스메들리 버틀러가 연설문을 보강해서 펴낸 것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반전문학으로 손꼽히는 책이다. 비간섭주의 또는 고립주의를 포기한 미국의 대외전쟁을 비판할 때 가장 기본적인 준거가 되는 자료로 거론될 정도이지만, 정작 추천사를 쓴 시한은 아들이 죽고 나서 1년 뒤인 2005년에야 이 책을 본 것이다. 필자가 이 책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신디 시한’처럼 너무 늦게 이 책을 읽었을 때의 회한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선 안되겠지만.

1961년 1월 17일 제34대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방대한 군사체제와 대규모 무기산업 간 결합은 전에는 미국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입니다. 경제, 정치, 심지어 정신 영역에까지 침투한 그것의 전면적인 영향력은 모든 도시, 모든 주 정부, 모든 연방 정부의 사무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우리는 군산복합체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갖게 될 부당한 영향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잘못된 힘이 재앙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군산 복합체의 권력이 우리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는 걸 방치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여겨선 안됩니다. 깨어 있고 지식을 갖춘 시민들이 평화적 방법과 목표로 이 군산복합체를 통제할 때에 비로소 국가 안보와 자유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퇴임연설의 일부)

훗날 널리 쓰일 ‘군산복합체’라는 단어가 최초로 공개적으로 등장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 아이젠하워의 퇴임연설은 미국의 TV와 라디오를 통해 생중계로 국민들에게 전달되면서 전 국민적인 논란이 된다. 하지만 이 연설이 논란이 되었던 이유는 그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이었으며, 이후 미국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군부세력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버틀러처럼 군부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꿰고 있는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퇴임 연설이었기에 국민들의 충격은 컸다. 그 이후 ‘군산복합체’는 현재까지 미국의 대외전쟁의 배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이고 공식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 

또한 그의 연설문은 이후 ‘음모론’이라 불리는 수많은 전쟁이론들과 새로운 평가들을 양산해낸다. 즉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쟁을 ‘군산 복합체’가 주도한 전쟁이라고 보는 시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뒤의 버틀러의 회고에 따르면 적어도 1차 대전 만큼은 군산복합체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모두 음모론이라기보다 실체에 가까울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 책은 아이젠하워의 연설이 있기 26년 전인 1935년에 이미 군산복합체의 실체를 파악한, 또한 그들의 음모와 주도로 전쟁이 비즈니스화 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저자에 대한 정보가 선행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의 본질을 폭로하는 이 책의 저자는 시민단체 출신의 평화운동가도 아니요, 평화이론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34년 동안 미 해병대의 군인이었으며, 120회의 전투에 참가해서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미 해병대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고 소장으로 퇴역한 그는 그야말로 전장을 가장 많이 누볐고, 가장 많은 전투를 치른 전쟁의 체험자였기 때문이다. 

▲ 해병대 준장시절의 버틀러.
저자인 ‘스메들리 버틀러(Smedley Darlington Butler)’는 1881년 7월 30일 펜실베이니아 주 웨스트체스터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퀘이커교(평화근본주의 종파) 집안 출신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인 1898년에 ‘스페인-미국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미해병대에 자원입대해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곧바로 쿠바에 파견된다. 그 이후 필리핀과 중국, 중남미로 파견되어 약 120회의 전투에 참여하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결과 해병대 최고 훈장인 <브레빗 훈장>을 수훈하고 미국 최고의 훈장인 <의회 명예 훈장>을 두 번이나 받은 유일한 전쟁 영웅이 됐다. 퇴역하기 전까지 16개의 훈장을 받았는데, 그 중 5개가 무공훈장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랑스에 위치한 미군 상륙 기지의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1929년 마흔여덟에는 최연소로 당시 해병대 최고 계급인 소장에 올랐다. 하지만 평소 평화주의적 소신 발언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비판한 발언이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이것이 빌미가 되어 해병대 사령관 인사에서 밀려나게 되자 1931년에 퇴역하고 만다.

퇴역 후에는 반전 평화주의 연설가로 미국 700여 개 도시를 돌며 1200여 회의 연설을 해 전국적인 명성과 지지를 얻었으며, 1935년에 자신의 연설을 보강해 이 책 <전쟁은 사기다>를 펴냈다. 출간과 동시에 화제작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이래 이 책은 오늘날까지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그는 1930년대의 반전 평화주의 운동을 이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듬해인 1940년 6월 21일 필라델피아 해군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 퇴역 후 반전평화연설가로 이름을 날릴 때의 버틀러.

전쟁은 사기다

이 책의 원제인 ‘War is a Racket’을 우리말로 '전쟁은 사기다’로 번역한 이 책의 정확한 의미는 '전쟁은 부정한(부도덕한) 돈벌이’ 쯤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전쟁이 미국 내 군산복합체들의 부정한 돈벌이 게임 또는 수단임을 폭로한 책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랬다. 전쟁은 아마 가장 오래된 사기일 것이다. 또 쉽게 가장 큰 이득을 남길 수 있는 사기이며, 확실히 가장 사악한 사기이기도 하다. 규모로 보면 독보적인 국제적 사기다. 이득은 달러로 계산하고 손실은 인명으로 계산하는 유일한 사기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사기’라는 말은 국민 대다수의 눈에 보이는 바와 전혀 다른 뭔가를 설명하는 데 딱 들어맞는다. 소규모 ‘내부’ 집단만이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하면서 실행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소수가 큰돈을 번다. (70~71쪽)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지원병 모집을 위한 미국 육군의 모병 포스터.
그의 글 맨 첫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전쟁은 대다수의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소규모 내부집단만이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은 그 소수집단이 큰돈을 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34년의 군대생활을 통해 깨달은 진리다. 통상 전쟁은 국토방위, 조국수호, 위대한 조국을 위한 희생 등등의 미사여구와 엄숙한 애국주의를 충분히 고양시키는 것들로 외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소수집단이 퍼트린 의도적인 프로파간다일 뿐, 실제 그 전쟁의 본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쟁의 본질을 관통하는 이익집단인 소수만이 결국 이득을 챙긴다는 것이다. 그들 이익집단은 바로 군산복합체들이다. 

이 책이 쓰인 시기는 1930년대로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2차 세계대전 개전 전야로 19세기 말 이래의 포성이 잠시 멈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조용한 시절에도 또 다른 전쟁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글 곳곳에는 이러한 위기의 시대가 반영되어 있다. 

다시금 그들은 편을 짜고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가 만나서 편들어 주기로 했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서둘러 비슷한 협정을 맺었다. 폴란드와 독일은 폴란드회랑에 대한 논쟁은 접어둔 채 서로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73쪽)

이러한 그의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죽고 얼마 안 있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중국과의 무역 규모는 연간 9000만 달러나 된다. 필리핀과는 어떤가? 미국은 35년 동안 필리핀에 6억 달러를 쏟아 부었고, (은행, 기업체, 투자업체를 비롯한) 민간 투자도 2억 달러에 육박한다. 고로 9000만 달러의 대중국 무역을 지키거나 필리핀에 2억 달러를 투자한 민간 자본을 보호하려면 일본을 적대시하도록 선동해 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다. 그 전쟁을 치르자면 수백억 달러의 비용과 수십만 명의 군인의 신체 불구가 되고 정신 이상이 생길지 모른다. (77쪽)

마치 태평양 전쟁을 예견한 듯한 글이다. 실제 일본의 진주만 폭격에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이미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본이 던진 선제수였던 것이다. (어처구니없이 당한 진주만 폭격에 대한 음모론이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통찰력은 군사전략가로서 충분히 검증된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그의 예언처럼 미국은 엄청난 전비와 젊은이들을 전장에 보낸 후에야 종전을 맞는다. 그의 예상처럼 이 전쟁에서 이러한 손실을 보상받은 이들은 수백만 달러,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인 군수품 제조업체, 은행, 조선업체, 육가공업체, 투자업체같은 소수였지만.

누가 벌어들이고, 누가 갚는가?

맞다. 그들은 또 다른 전쟁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을까? 큰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77쪽)

전쟁은 소수 기업집단들에게는 짧은 시간 내에 거액을 거둬들일 수 있는 폭리의 기회이며 사기극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기극의 희생자는 젊은 영혼들과 자식을 전쟁에 보낸 가족과 어머니들이다. 물론 이들 다수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에게까지 ‘부정한 돈벌이’의 수혜는 돌아오지 않는다. 

미국에서 통상적인 영업이익은 6%, 8%, 10%. 경우에 따라서는 12% 정도다. 그런데 전시의 영업이익은 기가 막히게도 20%, 40%, 100%, 300%, 심지어 1800%나 된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리고 벌려면 얼마든지 벌 수 있다. 갖는 자가 임자다. 물론 그 돈이 전시에 아무 명분 없이 쓰이는 것은 아니다. 나라에 대한 사랑, 즉 애국심과 관련 있는 말들로 포장된다. “우리는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합니다.” (83쪽)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가 아닌가? ‘고통을 분담한다’는 명제 말이다. 실제 전혀 자신들은 분담하지 않을 고통을 애국심이란 초콜릿을 발라 본질을 은폐시키고, 가장 저렴한 대가인 훈장 몇 개 던져 주고, 거액의 차익은 군산복합체와 그에 기생하는 정치가들, 은행가들의 몫으로 준비되어진다. 그런데 그들도 외친다.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우리도 전시 물자공급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그가 열거한 사례들 중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품인 탄약을 만드는 화약제조업체인 ‘듀퐁’사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연평균 영업이익이 600만 달러였다. 하지만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전쟁기간 중의 영업이익은 5800만 달러였다. 평시의 거의 10배였다. 듀퐁은 자기들의 화약이 민주주의를 구했다고 선전했는데, 이들은 ‘애국적 기업’, 즉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시기간동안 많은 기업들이 본연의 사업보다는 전쟁물자를 조달하는 ‘애국적 기업’이 되기를 자처한다. 

철도회사의 경우, 전쟁 물자를 만들기 위해 철도 선로나 건축골조, 교량골조 등은 내팽개치고전쟁 물자를 만드는 데 투입하여 6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전쟁기간 4900만 달러로 끌어 올린다. 철강회사들도 1억 500만 달러에서 2억 4000만 달러로 호황을 누린다. 구리회사가 1000만 달러에서 5년간 3400만 달러로, 니켈회사가 400만 달러에서 7300만 달러로 설탕회사가 200만 달러에서 600만 달러로 당시 상원문서를 통해 기업수익과 정부세입보고서를 보면 육가공업체 122개, 면직물 제조업체 152개, 의류업체 299개, 철강회사 49개, 석탄생산업체 340개의 전쟁기간 중 영업이익 증가를 살펴 본 결과 영업이익 증가가 25% 미만인 업체는 드물었으며, 석탄회사들의 경우 주식자본율의 100%에서 7856%까지 기록됐다. 

또한 최고의 알짜 이득을 올린 이들은 바로 은행이다. 하지만 은행들의 이득은 비밀로 되어 있어 단 하나도 공개된 바 없으나 수백만 달러,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전쟁이득은 누가 제공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국민들이다. 세금으로 내는 것이다. 소위 자유공채를 100달러에 사서 은행에 84달러나 86달러에 되판다. 은행은 그 차액을 챙기는데, 이것은 간단한 조작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공채가격을 떨어뜨려서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그러면 국민들은 앞다투어 가지고 있던 공채를 싼값에 은행에 판매하는 것이다. 은행은 공채를 사들이고 나면 다시 공채 붐을 조성해 액면가 이상까지 올려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버틀러가 소개한 전쟁이득을 갚은 이들 중 최악의 주인공은 사실 참전군인들이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그들 스스로 전쟁의 전투당사자로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이 바로 전쟁이득을 갚는 가장 중요한 주체라는 점이다. 

미국은 시민전쟁(1863년, 남북전쟁) 이전까지는 군인들이 입대대가로 1200달러라는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이제 이 돈도 아끼려 든다. 바로 징병제로 전환한 것이다. 결국 군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정부는 훈장장사를 시작한다. 시민전쟁 이후로 훈장들이 만들어진다. (훈장이 급여를 절단 내고 그 빈 여백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배운다.) 이 훈장 덕분에 모병이 수월해진다.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정부는 프로파간다를 이용해 젊은이들에게 징병을 받아들이게 하고 입대하지 않을 경우 수치심을 느끼도록 조장했다. 성직자들까지 동원해서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그리고 신화를 만들어낸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세계를 민주주의에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전쟁” 등이 그것이다. 실은 그들의 참전과 죽음이 어마어마한 전쟁이득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목구멍에 애국심을 쑤셔 넣으면서 우리는 그들이 전쟁 비용을 갚는 데 일조하게 만드는 결정도 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월금 30달러라는 고액의 급여만 지급하면 됐다. 그들은 이 푸짐하고 넉넉한 금액을 받은 대가로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고, 소중한 일자리를 버려야 했고, 깡통에 든 전투식량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그나마 그거라도 구할 수 있을 때),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야 했고, 그리고 죽어야 했다. 그런데 그 급여의 절반은 은 곧바로 떼여 부양가족에게 보내졌다. 그래야 자신의 지역 사회에 부양가족으로 인한 부담을 지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에게 상해보험을 내게 했다. 그래서 그는 매월 6달러를 보험료로 냈다. 그에게 남는 돈은 매월 9달러도 안됐다. 그런데 가장 파렴치하고 무례한 대접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급받은 탄약과 군복과 식량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라는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요구를 받아 결국 자유공채를 매입하게 된다. 대부분의 군인은 월급날 손에 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105~106쪽)  
     
결국 군산복합체들이 벌이는 비즈니스에 징병을 통한 참전군인들은 전쟁의 가장 처참한 피착취자가 됨 셈이다. 이러한 연유로 저자인 버틀러는 퇴역 후에 참전군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한다. 그의 반전평화활동의 대부분은 그들을 위해 시작한 일들이었다. 

전쟁의 사기를 막는 방법

그는 명쾌하게 이러한 전쟁의 사기를 없앨 수 있는 확고한 대안을 제시하는데, 3가지가 그것이다. 

첫째, 전쟁에서 이득을 보는 이가 없게 할 것
둘째, 무장을 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참전 여부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군사력을 자국 방어용으로만 제한해야 한다. (116쪽)

즉, 전국의 젊은이들을 징병하기 전에 자본과 기업과 노동부터 징발하는 것, 전쟁기간동안 무기공장과 군수품제조업체, 조선업체와 항공기 제주업체 등 군사복합체들과 은행과 투자업체 임원과 관리자들 고위 경영자들에게 전장에 있는 젊은이들과 동일임금을 지급하게 한다면, 또한 군산복합체의 노동자들과 다른 모든 노동자, 사장, 관리자, 책임자, 은행가, 장군과 제독, 모든 장교, 정치인, 공무원에게도 참호 속의 군인들에게 지급되는 월급보다 많지 않게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다. 죽임을 당할 위험도, 몸뚱아리가 부서질 위험도, 정신이 파괴될 위험도, 그들은 진흙투성이 참호 속에서 잠을 자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굶주리고 있지도 않다. 군인들만이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112쪽)

이 글은 직접 전장을 누볐던 저자의 야전 경험에서 체득된 전쟁에 대한 통찰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이 인용문은 전쟁을 없애는 첫 번째 단계의 준거가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전장에 가서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젊은이들이 직접 참전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의 실시이다. 즉, 모든 유권자가 아닌 전장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만 나라의 참전 여부를 결정하는데 투표할 권리를 주자는 것이다. 이는 전투원으로서 무장할 신체조건에 해당할 사람들이 거의 없는 의회에서 참전 결정권을 가지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버틀러의 견해는 우리나라에서 오히려 더욱 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의 장차관급 대부분이 이 핑계 저 핑계로 군대 면제를 받은 사람들인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그들의 금수저 자식들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군대 갈 일은 오히려 드물 것이다. 금수저 배지들이 더욱 많이 포진된 국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전쟁에 관한 결정권은 이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들이 핵무장론이나 전쟁불사론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고, 보온병을 포탄으로 판단하는 코미디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세 번째 단계로 군대를 오직 방어만을 위한 군사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세계경찰국가(누구를 위한?)를 자처하는 미국이 처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버틀러의 시대’ 이래 쭉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방어만을 위한 목적은 북미해안선으로부터 200마일(약 320km), 공군비행기의 정찰구역은 해안선에서 500마일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군의 작전반경은 해안선에서 2000마일 또는 3500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 오키나와와 한국에서는 아예 군사기지를 만들어 태평양전쟁 이래 주욱 주둔해오고 있다. 

이 세 가지 일이 이루어진다면 미국에서는 결코 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물론 적의 침략을 받은 방어전쟁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는 또한 전쟁을 반대하는 대통령의 공약이나, 전쟁 불개입을 선언한 정부의 정책기조가 별안간 바뀌는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돈 때문임을 지적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회의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며, 만약 이 회의가 라디오로 중계된다거나 방송언론이 취재가 가능하도록 한다면 미국은 절대로 세계대전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을 결정하는 회의에서의 주제는 평화와 전쟁 억제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 회의에서 연합국위원회 수장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것은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연합의 동기는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러분(미국은행, 미국 군수품 제조업체, 미국 공장, 미국 투자업체, 미국 수출업체)에게 50억 내지 60억 달러를 빚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패하면(그리고 미국의 도움 없이는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그 돈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독일도 갚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120쪽)

위 인용부분은 미국의 1차 대전 참전 계기가 독일의 유보트가 수행한 무제한 잠수함작전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 참전결정의 내막이다. 결국 우드로 윌슨은 평화와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보장하는 선택지에서 미국의 은행들과 군산복합체들에게 돈을 받아주기 위한 참전을 선택한 것이다. 당연히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구대륙의 낯선 전장으로,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전쟁에 끌려 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조기에 싸여 대서양을 건너 온 그들의 죽음은 세계평화와 미국을 위한 충정어린 희생이며 애국이라는 사기극으로 늘 마무리 된다.  

그는 왜 전쟁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군축회의’나 ‘군비 제한 회의’가 늘 성공하지 못하는지도 지적한다. 이들 회의에 참여하는 주체들은 대부분 직업군인과 정치가와 외교관들인데, 이는 마치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꼴이다. 이 회의의 중심은 당연히 직업군인들이고 그들의 목소리가 회의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직업군인들은 군비축소를 결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제독도 군함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어떤 장군도 지휘사령부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 모두는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21쪽) 

이 책은 전쟁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익숙한 방식에 새로운 인식의 경로를 열어준다. 그것은 바로 전쟁이 돈벌이를 위한 부도덕한 비즈니스라는 시각으로 환기시켜, 애국이니 조국이니 하는 거대담론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된 인식에 금이 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실제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이, 전쟁이 결코 애국주의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소규모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해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현재 남북대치상황인 우리에게 전쟁의 위험성은 늘 상존한다는 점에서, 특히 한미 소파협정을 통해 세계 최강의 군산복합체국가인 미국과 강고한 군사동맹이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파워게임이 중국을 대상으로 하여 동아시아의 해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최강의 군사적 강대국을 축으로 하는 군사적 위험은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휴전선을 맞댄 북한과의 갈등과 대립이 고조될 때마다 든든한 한미동맹을 과시하기 위해 괌과 미 본토로부터 한반도에 전개되는 B-52전략폭격기와 B2스텔스기, F-22랩터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이 결코 순진한 맹방 운운이 아니라 좀 더 다층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임을 이 책은 일깨운다.

또한 남방해역방어를 위해 조성한 강정해군기지가 “어느 제독도 군함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직업군인 정신의 발로이고, 직업군인들의 일자리 확대를 위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면 버틀러의 시선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 박경훈 화가

민중미술가, 문화운동가

전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전 제주민예총 이사장

현 도서출판 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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