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홍의 또 다른 이야기> 역시 우리의 ‘땅 문제’도 ‘개발정책의 문제’입니다

“100명이 사는 어느 섬이 있는 데, 이 섬에는 출구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어느 사람이 다른 99명에 대해 절대적 소유자가 되거나, 그 섬의 땅에 대한 절대적 소유자가 되거나 결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어느 경우에나 그 사람은 99명에 대해 절대적 지배자가 되고, 생사를 결정하는 힘까지도 생긴다. 다른 사람들이 섬에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바다로 쫓아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1839-1897)의 ‘진보와 빈곤(1879)’에서

바다로 쫓겨날지도

사회규모가 커지고, 관계가 복잡해지더라도 “같은 원인이, 같은 방식을 통해, 같은 결과를 낸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비유치고는 좀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에는 ‘시공을 초월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은 ‘땅을 가진 자가 결국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지배한다’는 보편적인 믿음에 대한 또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의 주장은 마침내 “생산력이 증가하는 진보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발생하는 이유는 토지 사유에 있다”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어떤 상황이든지 토지를 소유하면, 언제나 인간을 소유하게 된다”는 그의 전제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땅 소유의 필요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정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강조합니다. “그 필요성이 절대적일 때, 토지 소유에 따른 인간의 소유는 절대적이 된다”고.

‘미루어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유사한 것끼리 연결을 지어주지만, 자칫 진실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안에 대한 느낌이 다른 사안에 대한 느낌과 유사하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듯 ‘섬’은 공간적으로 ‘닫힌 세계’입니다. 설령 ‘바다로 쫓겨나는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섬의 경계를 벗어나면 우리는 한 발짝도 옮길 수 없습니다. 그냥 바다에 빠지고 맙니다. 제가 그 비유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이른바 ‘내몰림’에 대한 두려움

이 섬은 우리가 생활하는 유일한 터전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단순한 ‘터’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이 땅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났고 죽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들은 저 한라산과, 그리고 오름 자락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들꽃과 함께 모두가 ‘이 땅의 자녀’입니다. 어느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가 죽어도 이 땅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의 근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땅은 우리들의 사회적·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요인입니다. 그럴진대, 어찌 ‘우리의 땅’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땅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건 단순히 ‘땅의 위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의 막다른 삶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헨리 조지의 말대로 자칫 바다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거칠게 이야기해서 그건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내몰림 현상)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무모한 개발로 ‘우리의 땅’이 날로 황폐해지고, ‘땅의 주인’도 바뀌고 있습니다. 땅은 사고 팔 수 있겠지만 ‘제주사람’이 ‘제주의 땅’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는 ‘땅의 의미’가 숙고됐다는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는 현실입니다. 개발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직도 우리의 인식은 ‘위기의 근원’에 닿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

그 폭이 어느 정도가 될지 단지 모르고 있을 뿐, 분명 그 변화는 오고 있습니다. 조류가 썰물로 바뀌면 머지않아 물이 빠지게 되고 한낮이 지나면 머지않아 어둠이 오듯, 어쩌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이미 ‘내몰림의 길’을 걷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길은 들어서기는 쉽지만 빠져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역시 “사회는 아래에서 위로 죽어간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낯설고 과잉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입니다. 우리들 정신의 안이함은 사고(思考)의 혼란에서 비롯됩니다. 무지와 편견의 뒤에는 지역사회의 정서를 지배해온 강력한 이해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외부자본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어떤 자본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자본이라는 게 관광개발이라는 목표로 들어와서 결국은 그 목표를 외면하고 지역을 지배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역사적 교훈입니다. 목적에 대한 수단의 이러한 일탈은 우리에게 주변적인 것,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 오히려 우리들의 삶의 중심을 점령하게 된다는 사실 속에 정점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 같지만 단지 ‘대다수가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모든 것을 어둡게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정한 영역을 그어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완고한 발톱’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잔치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고 해서 의자를 돌려놓고 앉아 자기와 계약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극장에 먼저 표를 내고 입장했다고 해서 극장 문을 닫아걸고 자기 혼자만 공연을 관람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귀싸대기 맞고, 정말 쫓겨납니다.

적정규모의 수준으로 

그러나 우리 지역사회의 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전체 시스템의 차원에서 ‘적정한 규모의 수준으로’ 조절할 필요는 있습니다. ‘상주인구 100만 시대’를 거론하고 있지만, 그것을 구가하기 전에, 우리의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그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것부터 물어야 합니다. 그건 우리들의 ‘개발정책’에 대한 물음입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소리지만, 우리의 ‘땅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개발정책’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한 가지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지역사회의 발전을 중단시키는 요인은 오히려 발전을 추동하는 개발과정 속에서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환경파괴와 개발이익의 왜곡 등에서 확인하고 있듯, 그게 바로 퇴영의 원인입니다. 그건 진실입니다.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가장 의미 있는 진실입니다. 우리의 개발정책은 반드시 그 진실에 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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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지역 중산간 모습. 사진 출처=블로그 제주여행이야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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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인 강정홍.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개발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생각해야 합니다. 올바른 생각이 없으면 올바른 행동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늙어가고 마침내 죽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 전체의 힘은 개별 구성원의 힘의 합계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활력이 줄지 않으면 사회의 활력도 줄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제주 땅’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그리하여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가꿀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도…. / 강정홍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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