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2) 삶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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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주일 사이 더 커진 열매들. ⓒ 김연미

며칠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몸이 이상하다 싶을 때 미리 주사 맞고 약 먹고 했지만 병은 비웃기라도 하듯 내 몸 구석구석을 활개치고 다녔다. 두통과 오한, 평소 잘 걸리지 않는 목감기까지, 기침 한 번에 목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내 목에서 나는 목소리가 남의 목소리 같고, 팔 다리가 허공에 붕붕 뜨는 듯 했다.

무조건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는 진리를 철저하게 따르자고 생각 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도 다 학교에 나간 빈 집에 누워 약기운에 빠져 잠을 자다가 애초 뭘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좋았다. 온전히 내 몸을 위해, 나에게 주는 휴식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감기보다 더 확실하게 들어와 버린 무료함, 무료함은 그 색깔이 진해지면서 외로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직장과,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 갖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아주 잠깐씩 먹구름 사이 햇살처럼 주어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얼마나 난 소중하게 여겼었던가. 그런데 그 혼자만의 시간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의 두 손을 들게 하고 말았다. 드라마란 드라마도 다 봐버렸고, 영화도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냉장고를 아무리 뒤적여 봐도 맛있음직한 음식이 없었다. 인터넷 게임도 심심했다.

뭘 할까. 책을 읽는다거나 글을 쓴다는 것도 머리가 아프다. 아이들 오면 동네 산책이라도 가야지. 저녁때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겨우 집으로 왔다. 그리곤 가방을 바꿔 메고 다시 나갔다. 학원갈 시간이었다. 어떤 날은 집에 오지도 않고 곧장 학원으로 가버리기도 했다. 퇴근한 남편은 저녁을 먹자마자 침대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옆에서 징징거려봐야 소용없다. 하긴 나도 그랬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저녁도 먹기 싫을 때가 많았다. 만사가 귀찮고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들이 놀아주라고 할 때마다 거절하기 일쑤였다. 너희들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 독립성을 길러야 돼. 허울 좋은 명분이었다. 나중에 아이들 다 분가해 가고 나면 혼자만의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어떻게 채우게 될까.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혼자 계신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마음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외로움과 무료함, 그 공백의 시간을 일로 채우시는 마음, 나이 들어서 일하시는 부모님이 안쓰러워 일 못하게 하면 병난다는 말의 의미를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스위스에서 국민당 300만원씩 국가에서 무조건 지급해 주겠다는 내용에 대해 국민투표를 붙인다는 사실을 두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반대의견이 그러면 누가 일을 하겠냐는 것인데, 지극히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기서 난 느끼게 된다.

마냥 놀고 먹을 수 있다고 해서 행복까지 책임져 주지는 않는 것이다. 생계 문제를 국가가 책임져 준다면 국민들은 좀 더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제 몸을 놀려서, 혹은 제 머리를 써서 무언가를 이뤄낸다는 사실은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가.

결국 기침과 어지럼증을 무릅쓰고 다시 밭으로 나갔다. 하우스 문을 열자마자 미소가 번진다. 제법 후덕한 몸매를 자랑하는 오리 두 마리 여전히 달음질쳐 오고, 진초록 귤나무 이파리 사이 동글동글 열매들이 놀고 있었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돌잡이 아이들처럼 야무지게 크고 있었다. 집에서 혼자 보낸 그 무료했던 시간들을 한꺼번에 보상받고도 남는 모습이다.

무엇보다 일주일 사이 몰라보게 커진 열매의 크기가 대견스럽다. 일차 열매솎기가 끝나고 자연낙과도 이제 다 되어서 본격적으로 크는 일만 남았다.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한여름의 열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이들은 자랄 것이다. 그 열기가 서서히 뒤로 물러설 즈음엔 노랗게 익어갈 것이고 향긋하고 달콤한 과육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슬슬 돌아다니며 열매를 더 솎아냈다. 충분히 솎아낸다고 했지만 늘 열매 수가 많다. 따내버리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손이 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 때문에 한 두 개 더 남겼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가급적 크게 키우는 게 상품가치가 더 좋다. 손 안에 잡히는 열매가 탱글탱글 힘이 있다. 그 느낌을 고스란히 받으며 오래도록 과수원 안을 돌아다녔다. 감기의 기운은 사라진지 오래고. 무료함이나 외로움, 그런 거 난 모른다. 여기가 내 일터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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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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