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3) 농민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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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봉 효소를 만들기 위해 솎아낸 열매들. ⓒ 김연미

열매솎기 막바지에 이른 열매들이 제법 굵다. 탁구공만한, 혹은 골프공만한 열매들을 모두 모았다. 시시때때로 쳐준 농약성분을 제거하기 위해 물에 담가 박박 문지르며 씻었다. 세제를 넣어 한 번 더 씻어내고, 그래도 좀 불안해서 마지막 헹굼 물에 식초를 약간 타서 하룻밤 담가 놓았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는데, 향긋한 한라봉 향이 코에 닿는다. 상쾌하다. 그런데 열매의 색깔이 약간 변해 있다. 본래의 초록빛깔을 잃은 허여멀건한 색깔의 알맹이들이 풀죽은 듯이 섞여 있다.

식초의 양이 많아 그새 삼투압이 일어났나 보다. 식초의 성분을 간과한 데서 생긴 실수다. 다음에는 그냥 식초물로 헹궈내기만 해도 될 것 같다. 물을 바꿔 한 번 더 헹구고 물기를 뺐다. 약간 변색이 되긴 했지만 맑게 씻긴 열매의 표정은 싱그러웠다. 물방울 속으로 굴절되는 초록 빛깔, 그 싱그러움 위로 향긋한 한라봉 향이 더해졌다. 도마를 준비해 반쪽으로 잘랐다. 달콤하고 씁쓰름한 향이 더 짙어졌다. 초록의 겉껍질에 싸인 알맹이는 작았지만 꽃잎 같은 모습은 아름다웠다. 설탕에 재워 병에 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달콤하고 씁쓸한 한라봉 효소가 만들어질 것이다. 

농사에서 면적대비 수익의 비중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땅값, 시설비, 인건비 등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한다. 농산물 가격은 날마다 떨어지는데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땅값과 시설비,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인력은 농부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수지계산을 맞추기 위해 농사의 규모를 아주 크게 하거나, 아주 작게 하거나.

나의 꿈은 강소농이다. 애초 큰 게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밭에서 나는 생과만 판매하던 것에서, 쓸모없이 버려지는 모든 것들을 이용해 또 다른 상품을 만들어 보리라. 제조과정에서 들어가는 온갖 종류의 화학물질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본재료만을 이용해 제품을 만들어 낸다면 소비자의 관심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여름에 솎아내는 열매로 한라봉 효소를 만들고, 겨울에는 팔리지 않는 한라봉을 이용해 잼을 만들어보자. 우리도 먹고, 이웃도 나눠주고, 궁극적으로는 싸게 판매해서 농가소득에 일조를 기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정부에서 말하는 6차 산업이지 않을까. 내 가족이 먹는 것이므로 품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농가에서 직접 판매를 하는 것이므로 가격도 더 저렴할 것이다. 판매자도 좋고, 구매자도 좋은, 그런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생각이었다. 일단 판매를 하려면 그에 따르는 법적인 절차가 필요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시설과, 그에 따른 자본금 같은 형식적인 것들. 가정집 부엌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아무렇게나 판매하도록 우리나라의 법이 어수룩하지가 않은 것이다.

밭에서 버려지는 것들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 하려면 농부가 아니라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시설비 등의 투자비를 만회하려면 그만큼의 판매량이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블루베리 농사를 짓는 사람을 만났다. 제주도에서 8년째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 분은 블루베리 주스 두 박스를 내게 안겼다. 생과로 판매되지 못한 블루베리를 주스로 만들었는데, 그 주스마저 소비를 못해서 이렇게 들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정부로부터 선정된 6차 산업 지정업체는 판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농민들의 대부가 되어야 할 농협마저 이 블루베리 주스를 가판대 위에 올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음료 코너에 빼곡히 전시된 대기업의 제품들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그분의 눈자위 주름이 유독 깊었다.

제가 키운 과일이 그대로 썩어나가는 것이 아까워 주스를 만들었다. 그 주스를 만들기 위해 농사자본보다 더 많은 자본을 가지고 시설투자를 해야 한다. 그 시설비를 만회할 제품은 거대자본에 밀려 판매조차 되지 않는다. 농민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환태평양 지진대 불의고리처럼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뚜렷이 감지되었다. 답답했다.

아직 이렇다 할 결론은 없다. 6차 산업의 실상이 그렇다 하더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아직 뚜렷하게 잡히는 것은 없지만 방향을 정확하게 잡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열리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이 나타날 때까지 모든 농부들의 마음으로 매사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일렬로 선 네 개의 유리병에 날짜를 써 넣었다. 이로써 나의 임무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니, 한 가지 임무가 더 남았다. 좋은 효소가 만들어지면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나의 임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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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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