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4) 유년시절 공포심과 호기심이 맞닿아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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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국. ⓒ 김연미

어릴 때 내가 살던 집은 마을과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집과 집이 이어지는 마을의 마지막 집을 지나 밭과 밭을 한참 돌아 긴 올레를 따라 들어가면 삼나무 울타리 깊은 밭 한쪽에 우리가 살던 집이 있었다. 남쪽으로 망오름이 이마를 맞추어 섰고, 마당 너머 소나무 숲이 울울창창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보다 바람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집에서 산다는 것은 늘 외로움을 동반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세상과 연결되던 학교마저 가지 않는 일요일이나 방학이 되면 우리는 나무들 속에 갇혀서 아웅다웅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나무들의 세계를 올려다보곤 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모든 것들이 풍족했던 당시, 아침 밥상머리에서 은밀하게 주고받는 이야기들 속에는 가끔 어젯밤 마당 앞 소나무 숲에 도깨비불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숨어 있었다. 입으로 내뱉는 말보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야기가 더 많았던 당시 내게는 생각의 한쪽에 도깨비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머리에 뿔을 달고 눈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은 여느 도깨비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송곳이 뾰죽뾰죽 난 도깨비 방망이 대신 커다랗고 둥근 불빛을 내며 다니는 좀 특이한 도깨비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혼자 만나는 도깨비 불빛은 나의 오금을 저리게 하였다. 흔들흔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내가 지나가야 하는 길 모퉁이에 버티고 있는 도깨비 불빛. 얼어붙은 발자국을 어쩌지 못해 한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면 점점 내게로 다가오는 불빛의 고리. 마중 나오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질끈 감을 무렵, 불빛 속에서 들려오던 동네 아주머니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까지 내 전신을 옴짝달짝 못하게 만들었던 그 공포감은 오래도록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사실 도깨비불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현상인지 이미 학교에서 배운 것이었지만 가로등도 없고, 집도 없는 농로를 밤에 혼자 걸으며 생기는 공포는 모든 논리를 무색하게 하고도 남았다. 사실 그런 이론으로 나타나는 도깨비불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늦게 밤일을 마치고 오는 동네 어른의 후레쉬 불빛을 도깨비불로 착각하고 공포감에 떨었던 것이다. 

동쪽 울타리를 건넌 밭모퉁이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었다. 무성한 수풀이 우거져 있고, 여름이 되면 그 수풀 위로 꽃이 피었다. 둥글둥글 피어나는 꽃은 파란 색깔과 가끔 푸르딩딩한 색깔과 흰색과 연두빛이 섞인 제맘대로 색깔을 바꾸며 피어나고 있었다. 도깨비의 불빛과 비슷한 꽃이었다. 밤에만 돌아다니는 도깨비가 낮에는 저 꽃으로 변장해 숨어 있을 거라는 상상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밤마다 머리맡에 푸른 등을 달았어
소나무 숲에 살던 도깨비 불빛들이
계집애 재잘거리듯 꿈속에서 놀았어

잠에서 빠져나온 개구쟁이 얼굴들이
돌담 아래 숨어들어 꽃인 양 시침 떼는
제 모양 제 색깔대로 재잘재잘 피어나

시간 따라 변하는 게 꿈만은 아니었어
무성해진 수풀사이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
꽃 안에 꽃을 피우며 길을 찾고 있었어.

-졸시 <수국> 전문

내 유년시절의 공포심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 맞닿아 있는 수국이었다. 

그런 수국이 최근에 들어 사방에 지천이다. 사람들이 그만큼 좋아하는 꽃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품종 개량이 되었는지 색깔도 붉은 색에서 파란색, 노란색, 파스텔톤 계열의 색깔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더군다나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처럼, 펑퍼짐한 내 몸매 같은 꽃의 크기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시선과도 잘 맞아 있는 것 같다. 나도 그 화려하고 세련된  표정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거리로 나온 수국과 얼굴을 맞대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산수국의 표정에서 예전에 알지 못하던 것들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도깨비가 표정을 바꾸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처연하고, 슬픈 사연을 감추고 있는 듯, 그늘 아래로만 숨어드는 산수국. 그 표정에 감추어진 이야기에 홀려 끝 모를 심연에 빠져들고 있었다. 제1횡단도로를 타고가다 교래리로 빠져드는 길로 접어들면 길 양옆으로 늘어선 산수국의 행렬. 있는 듯 없는 듯, 지나는 이들에게 아는 체도 않는 모습이지만 그들에게 빼앗긴 시선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

가끔 빗방울 촉촉이 머금어 고개 숙인 그들의 모습을 보는 날이면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안개비 촉촉이 내리는 초여름의 어느 날, 무조건 차를 몰고 교래리 어디쯤, 혹은 사려니 숲길 시작점 그 부근으로 가자. 흠뻑 젖은 채 옆으로 살짝 고개 돌린 스물넷 처녀 같은 산수국을 만나러.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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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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