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6) 한라봉 매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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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렁주렁 매달린 한라봉. ⓒ 김연미

며칠 째 장마다. 터줏대감처럼 버틴 안개 위로 오락가락하는 장대비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를 스케치하곤 했다. 태양을 잃어버린 해바라기는 아직 꽃을 품지 못했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철거덕 철거덕 헐리던 과수원도 철거를 멈췄다. 안개는 과수원의 비닐하우스를 지우고, 밭으로 가는 길을 지우고, 하루의 일과마저 지웠다. 길가의 풀들은 깊어지고 정자나무 아래 모인 농부들의 어깨마다 하얗게 걱정처럼 안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 깊은 안개 속에서도 난 바빴다. 아침 다섯 시, 검은 어둠이 물러나는 자리에 다시 하얀 어둠이 찾아드는 길을 달려 과수원으로 향했다. 내 아들 주먹만큼 커진 한라봉을 마저 매달아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은 안개도 빗방울도 침입하지 못하는 날씨의 성역이다. 고열의 체온을 유지한 내부는 변화무쌍한 날씨로부터 저 홀로 독야청청이다. 하얀 어둠 속에 의심처럼 보이던 사물들이 여기선 확실하게 선을 긋고 개성을 자랑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장마는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의 열기를 장마의 안개와 비가 일정정도 식혀주기 때문이다. 아침 새벽 해가 오르기 전부터 한낮의 열기가 본격화되기 직전까지, 그리고 그 열기가 어느 정도 식을 오후에서 저녁까지가 한여름 비닐하우스 작업 시간이다. 그러나 장마 기간에는 한낮의 빈 시간까지 작업시간으로 다 채울 수 있다.

한라봉 매달기는 아직 삼분의 일 정도 더 해야 한다. 하얀색 끈의 끝점에 하나씩 매달린 한라봉 크기가 제법 굵다. 비닐하우스 이쪽과 저쪽의 끝점을 연결한 철사에서 하얀색 끈이 내려오다 허공에서 한번 매듭을 걸었다. 그 매듭을 기점으로 확성기 소리 터지듯 내려간 직선의 하얀 끈. 귤나무 이파리들의 초록색 바탕위에 그어지는 하얀색 직선들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더 단단한 파란색 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얀색 끈을 사다 쓰는 이유이다.

한라봉 매달기는 수많은 매듭들을 만들어야 하는 작업이다. 매듭짓기를 처음 배울 때 난 내 머리가 이렇게 나빴었나 하는 자괴감을 가져야 했었다. 중심 매듭과 귤 사이에 정확한 거리를 재고 마술처럼 손가락을 돌려 고리를 만들면 거기에 편안하게 제 몸을 맡긴 한라봉 하나가 생겨났다. 내게 방법을 설명해 주시던 시어머니의 얼굴은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하는 표정이셨다. 

그러나 몇 번을 해도 제대로운 고리는 생기지 않았다. 크기가 조절되는 고리 는 한라봉이 빠지지 않도록 조여주기도 하고 느슨하게 풀어주기도 해야 하는데 내가 만든 고리는 심지 굳게 제 크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고리가 제대로 만들어지면 중심 매듭과 한라봉과의 거리가 맞지 않았다. 풀고 다시 묶기를 반복하는 사이 고리의 크기가 조절되고, 줄의 길이가 더듬더듬 제자리를 찾아가기는 했다. 그러나 속도는 한량없이 더디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매듭을 지으면 나무 두 그루 겨우 끝났다. 이 속도로 언제 저 많은 한라봉을 다 매다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속도는 제법 나아진 지금, 한라봉 묶기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현상에만 매달려 있다. 한라봉 무게를 받쳐주고, 나뭇잎 속에 묻혀 있는 열매들이 햇빛에 노출될 수 있도록 적절한 간격을 유지시켜주는 게 열매 묶기 본래의 목적이라 한다면, 난 지금 무조건 이 열매를 다 묶어야 한다는 사명감에만 불타 있다. 온전히 그게 목적인 것처럼. 하루하루 일의 분량을 생각하고 기계처럼 손을 놀리다보면 줄에 매달린 가지는 사방팔방으로 휘어져 있고, 열매와 열매들은 서로 엉켜 부딪치고 있었다.

나뭇잎에 파묻혀 원래보다 더 햇빛을 받지 못하는 열매들도 생겨났다. 그렇게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얼굴을 들어 시선을 멀리하면 초록색 나무들 틈새마다 쳐진 하얀색 빗금들. 그 직선의 미학과 보일 듯 말 듯한 감춤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장마임에도 몸은 땀에 절고, 뜨거워진 얼굴의 열기가 자꾸 안경의 시야를 흐리게 하지만 초록색과 하얀색의 조화 앞에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비가 온다. 우두두두 두두두... 휴대폰에서 들리는 방송이 빗소리에 묻힌다. 잠시 이어폰을 꺼내 끼고 다시 손을 움직인다. 나무 사이사이 하얀색 빗금들이 쳐진다. 초보자의 붓칠처럼 천천히 세심하게 초록색 도화지를 채워 가고 있었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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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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