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칼럼> 죽임의 역사를 복원하는 4․3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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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국립파리 피카소미술관. 사진 제공=김관후. ⓒ제주의소리

섬 곳곳은 죽임의 현장 

※김종원(金鍾元)의 시 「奉蓋洞(봉개동)」은 1962년 『濟州道(제주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 시가 발표된 시기는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1961년 5·16군사정변이 우리의 눈과 귀를 막고, 입까지 봉쇄한 직후였다. ‘혁명공약’을 달달 외우던 그 참혹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奉蓋洞(봉개동)」은 세상에 낯을 드러내었다. 

제주4․3 당시 봉개동의 명도암과 대나오름 등 일본군의 갱도진지는 주민들의 피신처로  이용됐다. 1948년 11월 20일 마을이 초토화되면서 주민들은 인근 야산과 불타버린 집터에 움막을 짓고 피난살이를 했다. 그 해 2월 4일 육해공 합동으로 펼쳐진 대규모 작전은 비행기와 로켓포, 박격포까지 동원하였다. 그 후 주민들은 성안에 함바집을 짓고 살았다. 

그 후 마을재건이 이뤄졌다. 일본군 출신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이 주민들을 원거주지로 복귀시키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함병선의 성(姓)과 작전과장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함명리(咸明里)’로 개칭했다. 교회 이름도 ‘함명교회(咸明敎會)’였다. 

‘타 버려싱게/ 아홉 살 적 풋대추 찾아 기어오르던/ 안마당의 대추나무도/ 타 버려싱게/(중략)/ 할아버지는 오척 단구/ 술 담배 입도 못 대신/ 대쪽 같은 선비/ 집 한 채 다 타고 잿더미만 남던/ 사삼사건에도/ 눈시울 한번 안 젓시더니// 안반 다락/ 이불 베개 삼던 한서적(漢書籍) 다 타고/ 불꽃 되어 날을 땐/ 손주처럼 발을 구르신/ 김해김씨(金海金氏) 문중의 어른/ 아, 그 법 없이도 살 수 있던/ 내 할아버지는/ 지금 봉아오름을 더나고 어싱게// 타버려싱게/ 글만 알고 곡식 모르던/ 툇마루의 버선발/ 꿈심던 뒷마당의 죽순도/ 다 타버리고 어싱게’ - 김종원의 시 「奉蓋洞(봉개동)」에서.

※김익렬․ 김달삼의 평화협상 사흘만인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청년단체들이 대낮에 들이닥쳐 10여 채의 민가를 태우고, 오후 2시경 무장대 출현 소식을 접한 경찰기동대가 2대의 트럭을 나눠 타고 마을로 출동했다.  경찰의 후원아래 우익청년단체들이 방화를 자행했다. 방화사건은 미군 촬영반에 의해 입체적으로 촬영됐고,  미군은 그 필름을 통해 방화사건이 무장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편집해 놓았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담배꽁초를 던졌다/ 침 뱉었다/ 오라리 마을/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할아버지 따귀 갈겨봐// 손자는 불응했다/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세게 때려 이 새끼야/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세게 때렸다/ 영감 손자 때려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세게 쳐/ 세게 쳤다//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울면서/ 서로 따귀를 쳤다// 빨갱이 할아버지가/ 빨갱이 손자를 치고/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이게 바로 빨갱이의 놀이다 봐라// 그 뒤 총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임차순과/ 손자 임경표/ 더 이상/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총소리 뒤/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 고은(高銀)의 시 ‘오라리’.

2008년 노벨문학수상자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 Le Clezio)가 프랑스판 『지오(GEO)』 2009년 3월호에 「제주매력에 빠진 르클레지오」란 제목의 제주여행기를 실었다. 그는 지금 제주4․3 관련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다.  

‘성산일출봉을 보고 있노라면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화산섬 마우리티우스의 모른봉이 떠오른다. 똑같은 비극을 담고 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4.3사건 때 민병대에 끌려온 성산 마을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곳이다. 마우리티우스의 모른봉은 반란 노예들이 인도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끝까지 기어올라 허공에 몸을 던진 곳이다.’ 
 
그의 고향 마우리티우스 공화국이 바로 모리셔스(Republic of Mauritius)이다. 모리셔스는 아프리카의 동부,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나라이다. 그는 “나의 정신적 고향은 모리셔스섬이며 여전히 나의 국적도 모리셔스다”고 할 만큼 ‘섬의 사람’이다. 모리셔스섬사람들이 그 섬의 사람이 아닌 다른 지역 사람(침략자)들에게서 핍박당한 아픔이 있듯이 제주섬에도 그 같은 아픈 역사가 있었다.  
 
‘오늘날 냉전의 기억은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 바다에서 멱을 감고 자기 조상의 피를 마신 해변에서 논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성산 마을의 한 여인이 경찰에 남편이 끌려가는 것을 봤다.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나갔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여인의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경찰 중 한 명이 그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여인은 받아들였다. 경찰은 그가 처형했던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이 감동적이면서 잔인한 역사, 슬프면서도 삶의 욕구로 가득 찬 철학이 제주의 영혼이다’

르 클레지오는 1948년 학살사건이 일어난 성산일출봉에 올라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난 모리셔스의 모른 바위를 떠올렸다. “이제 잔인했던 과거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피를 마신 모래 위에서 뛰놀고 있다”고 말한 그는 “감동적이면서도 끔찍한 4·3이야기는 슬프면서도 동시에 섬에 스며든 생존의 열망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고백했다.

‘미국’은 과연 어떤 나라? 

‘미국이 있으면/ 삼팔선이 든든하지요/ 삼팔선이 든든하면/ 부자들 배가 든든하고요’ - 김남주(金南柱)의 「시 쓰다만 시」.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 대창에 찔린 깨구락지처럼/ 든든하던 부자들 배도 처지나요’ - 김남주의 시 「다 쓴 시」.

1945년 8월 15일부터 조선 땅에는 미국이 지배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동년 9월 7일,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 미국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는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는 내용의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포고 제1호를 발표했다. 

미국이 점령한 사이(1945.8.15~1948.8.15)에 터진 제주4․3의 항거와 투쟁이 누구에 대한 항거였으며, 무엇을 위한 투쟁이였는가.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돼 있지 않았고, 미군은 연합군 세력으로 한반도 이남을 지배 점령했다. 재판권이나 발포권, 교전권 등 모든 주권은 미 점령군에 있었다.  이승만 우익세력은 미국의의 용병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1945년 8월 15일/ 이날은 해방의 날이 아니란다/ 제국-마메리카 병사들/ LST군함에 몸을 담고/ 미지의 땅/ 제주섬에서/ 작전명령을 기다린다/ M1 소총과/ 수류탄/ 저장된 CIC의 정보분석에 따라/ 살해를 임무로 해온 미병사들은/ 콩밭에서/ 도로변에서/ 조국의 딸들을 쓰러뜨렸다네//(중략)// 제국-일본군이 이 땅을 떠나가기도/ 훨씬 전부터/ 장사꾼-기업가 회사원-들의 손에는 코카콜라가 쥐여졌고/ 아메리카의 이익을 조선의 번영이라고/ 아메리카의 번영을 조선의 발전이라고/ 아메리카의 발전을 조선의 근대화라고/ 가르치기를 시작했다네// (중략)//....고립작전/ 바비큐작전이라네/ 불사르고, 죽이고, 약탈하는 섬광작전이라네/ 불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삼진작전이라네/ 무지개부대 비밀작전-유격전술, 육해상 침투, 공중낙하, 산악전술, 공작, 심리전, 도하전술, 전이, 태업, 생존훈련, 첩보, 유격, 방첩, 반첩보, 반벙첩(米軍에게 특수훈련을 받은)이라네/ “1. 작전 구역의 공비분자는 전원 사살하라 2. 공비의 거점인 부락 가옥을 전부 소각하라 3. 식량을 안전지대로 운반하라”는/ 작전명령이라네’ - 김명식(金明植)의 시 「점령지에서 아메리카군」.  
 
이승만은 학살의 주범 

이승만(李承晩)은 제주4·3 당시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강경진압작전을 지시했다.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에도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한국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은 불법계엄령을 선포했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 색원해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해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했다. 특히 이승만은 입산자 대부분이 ‘공산당 선전에 속거나 집이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산에 올라간 자’임에도 이들을 ‘폭도’라 해 무차별 총살을 명령했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내세운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당시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특히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를 동원한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제주4·3 당시 군·경을 장악한 당사자는 누구인가? 물론 이승만과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승인 없이는 군사이동도 불가능했다. 당연히 제주4·3은 이승만과 미국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승만은 친일 경찰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제주4.3사건, 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 이승만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 이승만은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왜놈의 씨를 받아 / 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 / 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 / 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 / 머리를 숙여 /(중략)/ 그러나 오늘날 또한 /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 / 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 / 삼천오백만 불의 빚을 걸머지고 / 생각만 하여도 이가 갈리는 / 무리들에게 짓밟혀 / 가난한 동족들이 / 여기 눈물과 함께 우리들 앞에 섰다 /(중햑)/핏발서 날뛰는 / 외국 주구들과 / 망령한 영감님들에게 / 저승길로 떠나는 노자를 주어 / 지옥으로 쫓아야 한다.’ - 유진오(兪鎭午)의 시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소설로 풀어가는 제주4․3  

※재일작가 김석범(金石範)은 조선적(朝鮮籍)이다. 조선적이 된다는 것은 조국의 분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니 무국적자 신분일 수밖에 없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서는 민족허무주의자이자 반조직분자라고 지탄을 하는 한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는 반한분자, 북한 찬양자로 불리며 기피 대상이다. 

『火山島(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은 첩첩의 장벽 앞에서 글을 써왔고,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고집했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한 채 일본으로 밀항했고, 그는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해방공간의 제주도는 한국의 이방이었고, 육지의 식민지였다. ‘제주인’이면서 ‘재일’은 이중의 굴레였다. 제주에 있든 일본에 있든 제주인들에겐 ‘빨갱이’란 집단적 오명이 씌워졌다. 

김석범은 4.3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지만 증언과 자료, 기억, 상상력에 기대 『火山島(화산도)』를 써 내려갔다. 『火山島(화산도)』를 포함한 ‘김석범 문학’은 망명문학이다. 김석범이 조국의 ‘남’이나 ‘북’의 어느 한쪽 땅에서 살았으면 도저히 쓸 수 없었던 작품들이다. 원한의 땅, 조국 상실, 망국의 유랑민, 디아스포라의 존재, 그 삶의 터인 일본이 아니었으면 『火山島(화산도)』도 탄생하지 못했을 작품이다.  김석범은 ‘일본어 아닌 일본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그는 ‘북한이 어디 사람 살 곳인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는 남에 있었어도 죽었을 것이고, 북에 있었다면 총살당했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제주4․3은 1978년 9월 소설가 현기영(玄基榮)이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중편소설『순이삼촌』을 통해 그 진상과 상처의 일부를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작가는 4․3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돼 고초를 겼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4․3사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이삼촌』은 공비토벌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제주사건을 민중적 시각에서 조명하려 했다는 점, 서북청년단 출신 순경들의 작태를 고발하여  반인륜적 행위를 폭로했다는 점, 역사적 사실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가열한 비판의식이 돋보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관광객들이 누비는 성읍민속마을의 안길에 주인공의 그림자가 비친다. 힘 좋은 사내가 그를 바닥에 패대기친다. 여자가 울며불며 말려보지만 소용없다. 그래도 그는 떠날 수 없다. ‘북한엘 가보니까 우리가 애써 만들어놓으려고 했던 공산주의자는 아니데…’라는 주인공의 고백은 그가 왜 굳이 영주리로 돌아왔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허연 눈물을 쏟아낸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허공 속에 흩어졌고 이데올로기 싸움에 죄없는 사람들만 씻어내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실제 제주4·3의 광풍 속에 아내와 4남매를 처참하게 잃은 조몽구(趙夢九)는 후손이 없다. 영주산 공설묘지 첫 머리에 놓인 그의 무덤은 친척들이 돌봤다. 조몽구는 성읍공동묘지를 떠났다. 성산읍에 가족묘지가 조성되면서 그곳으로 이장됐다. 오성찬(吳成贊)은 1989년 조몽구를 모델로 한 중편소설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를 『실천문학』에 발표했다. 
 
강문석과 김달삼, 그리고 이덕구 
 
※강문석(姜文錫)은 김달삼(金達三, 본명 李承晋(이승진))의 장인이다. 자기가 사용하던 가명 김달삼을 사위가 사용하도록 했다. 박헌영의 오른 팔이자 남조선로동당 간부이며, 1946년 2월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돼 노동문제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 신진세력의 리더로서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23세의 청년 김달삼이었다. 김달삼이 어째서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크게 부상하게 되었는가? 그의 장인 감문석의 후광 때문이었다. 

‘과연 그 장인에 그 사위/ 김달삼/ 본명 이승진/ 일본 예비 육군사관학교에서/ 하필 김익렬이 동기생이었다/ 김익렬은 제주도 9연대장/ 두 사람은 단 한 번 4.3사건 휴전 담판을 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고/ 고개 저으며/ 산에서 돌아온 김익렬은 생각했다’ - 고은의 시 「장인 강문석」.

 ‘그의 미남은 여성의 도구가 아니라/ 바람 치는 혁명의 도구였다/ 4·3사태 뒤/ 황해도 해주로 갔다/(중략)/ 6·25 사변 직전 태백산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4·3사태와 함께/그의 행방은 아무도 몰랐다’ – 고은의 시 「김달삼」.  

‘5병대 7병단 1군단/  김생 김달삼 이호제 박치우 서득은/ 여러 슬기로운 지휘관들의 피/ 아직도 눈 위에 임리하고/ 청옥산 태기산 일월산/ 국망봉 백암산 준령들의 산정 위/ 피바람 불어 끊이지 않는 저/ 험준한 태백산 전구의 이름과’ - 임화의 시 「기지로 돌아가거든」.

※이덕구(李德九)는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이며 김달삼에 이어 제2대 인민유격대장이다. 1945년 귀향한 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쳤다. 얼굴은 살짝 곰보이며 미남형이다. 늘 목소리가 컸으니 이는 미군정에 의해 구인(拘引)돼 고문을 받을 때 고막이 파열되어 귀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토벌대에 의해 1949년 6월 7일 16시 화북지구 제623고지에서 사살됐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정문 입구에 그의 시신을 걸쳐 세워 전시했다.  

‘스무엿새 4월의 햇, 살을 만지네/ 살이 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가죽나무 이파리 사시나무 잎 떠는 숲/ 가죽 얇은 내 사지 떨려오네// 울담 쓰러진 서너 평 산밭이/ 스물아홉 피 맑은 그의 집이었다 하네/ 아랫동네를 떠나 산중턱까지 올라온/ 아랫동네 사기사발과 무쇠솥이 깨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네// 그 숲에나 잡목으로 서,/ 살 부비고 싶었네/ 그대 한 시절에 무릎 꿇은 것, 아니라/ 한 시절이 그대에게 무릎 꿇은 것, 이라/ 손전화기 문자 꾹꾹 눌렀네// 산벚나무 꽃잎 떨어지네/ 음복하는 술잔 속 그 꽃잎 반가웠네/ 그대 발자국 무수한 산밭길의 살비듬/ 어깨 서서히 데워주었네/ 나 며칠 북받쳐 앓고 싶었네’ - 정군칠의 시  「이덕구 산전」.

제주4․3의 의인 김익렬과 문형순   

※김익렬(金益烈)은 해방 후 일본군 학병으로 귀환했고,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했다. 1947년 9월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하고, 1948년 2월 제9연대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1948년 4월 28일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추진했다. 협상이 체결돼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강경 일변도의 진압 정책으로  평화협상은 깨졌다. 그는 9연대장에서 해임됐다. 

‘(중략)/ 김익렬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인민유격대 대장 김달삼과 대좌한/ 다음이었다. 그러나 김익렬은 김달삼을 보는 순간 또 한 번 깊은/ 충격을 받았다. 김달삼이 자기처럼 젊고 그 어느 미남배우보다/ 도 더 잘생긴 얼굴이어서가 아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김익렬은 넋 빠진 사람처럼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김달삼이 태어난 곳은 남제주군 대정면 영락리였다. 그는 일본/ 에서 중학교를 거쳐 일본 복지산(福智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소위였다/(중략)/ 그런데/ 그 김달삼이와 김익렬은 바로 일본 복지산 예비육사 동기였던/ 것이다/ 나이도 둘 다 27살이었다/ 그러나 김달삼은 가명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김익렬이 제대로 기억을 못하는 것이었다/ 김달삼이 본명은 이승진이었다/ 한때의 친구가 이젠 적과 적이 되어/ 서로 절벽처럼 마주보고 있었다(중략)’ - 이산하의 장편서시시 「한라산」에서.   

※문형순(文亨淳)은 만주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조선혁명군 집행위원이었다. 1947년 7월에 제1구경찰서(현 제주서) 기동대장, 동 10월에 경위로 한림지서장이 됐다. 1948년 12월부터 잔인한 토벌이 벌어지자 모슬포 경찰서 서장서리(초대 서장)로 근무하다가 1949년 10월 19일 경감으로 승진하면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전출했다. 제주지구토벌대사령관이던 최경록·송요찬·함병선은 모두 일본군에 있었다. 문형순은 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보호했다.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까지 거부했다. 4․3축성 창안자이기도 하다.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된 주민들에 대한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며 거부했다.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제주사람들은 문형순을 그렇게 음률을 맞추어 기억하고 있다. “왜 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거야? / 안 돼// 광복군 출신으로, 친일 군경과 맞짱 뜰 수 있는 배짱과 용기// 너희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게 뭐야?/ 부당함으로 불이행!// 말년엔 여느 독립 운동가들처럼 쓸쓸하게 죽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 김경훈의 시 「부당함으로 불이행」 전문.

육지형무소로 끌려가다 
 
※『白首餘音(백수여음)』 저자 석우(石友) 김경종(金景鍾)은 구한말의 거유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의 문하생이다. 그의 문집에는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행패와 이승만의 책임을 서릿발처럼 비판하는 글이 포함돼있다. 그는 제주4·3으로 아들 김창령(金昌鈴)이 붙들려가고 김천형무소에서 한국전쟁으로 사망했다. 특히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문의 편지글 「與李承晩書 己丑(여이승만서 기축, 1949)」과 나중에 쓴 성토문 「李承晩聲討文 庚寅(이승만성토문 경인, 1950)」은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제주4·3 연루자들의 무고한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글이다. 그리고 그 책에 수록된 시 중 다음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山河万變水東流(산천 만 번 변하여도 물 동으로 흐르나니)/ 白首呼兒泣古洲(옛 물가에 눈물 떨구며 아들 찾는 백발이여)/ 節義當年忠死地(절의는 이 해 맞아 충성스레 죽어가고)/ 兵戈此日?灰樓(전쟁이 겁나고나 이날 누대 재 되었네)/ 神明倘識焦心恨(신명이 행여 타는 한스러운 맘을 알까)/ 世亂空添觸目愁(세상의 어지러움에 괜스레 더해진 근심)/ 骨肉不知烏有在(아들이 어딨는지 아아 아지 못 하겠네)/ 惟魂遙向故園遊(혼 되어 노닐었던 옛 동산을 향하는가)’

※목포형무소에서는 1949년 9월 14일 오후 5시 재소자 400여 명이 무기고를 습격하고  탈옥했다. 사고 당시 수용인원 수는 1421명, 탈옥 폭동에 참가한 수는 1000명, 군경합동 공격으로 500명은 즉시 진압되고, 353명은 완전 탈옥. 목포형무소 사건의 원인은 죄수들에게 대우를 잘못 한 일. 600명밖에 수용못 할 곳에 1421명 수용. 죄수들은 앉아서 잘 수밖에 없는 상황. 600명 가량의 제주출신 재소자가 있었다. 『목포형무소 출소좌익수명단』에 따르면 제주출신 재소자는 51명. 이들은 탈옥 후 사살됐다.

‘야, 이 빨갱이 새끼들아/ 지금부터 내 말을 명심해서 잘 들어라/ 나는 너희들을 육지 형무소까지 압송할 책임자다/ 너희들은 국방경비법 제32조 제33조 위반으로/ 평생을 감방에서 썩을 것이다./ 중간에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수상한 짓을 하면/ 가차 없이 즉결처분할 것이다/ 아니 저 바다에 산 채로 던져버리겠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의 길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었네/ 배의 간판 아래 물칸에 쓰레기처럼 처박혀진 채// 구토와 설사와 멀미는 차라리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었네/ 병들어 죽은 자들은 진짜로 바다에 던져버렸네/ 생고생을 다한 후에 우리에게 찾아든 건 생죽음이었네// 목포형무소 그 높다란 벽안에 갇혀서야/ 우리는 우리의 형량을 알 수 있었네/1년 3년 5년 7년 15년 그리고 무기/ 교도관이 부르는 숫자에 따라 우리의 가슴이 뻥뻥 뚫려나갔네// 1949년 9월14일 목포형무소 탈주사건이 있을 때/ 더러는 도망쳐서 지리산으로 숨어들었지만/ 더 많은 수가 거리에서 형무소 안에서 사살되었네// 1950년 6·25전쟁이 터진 후에도 우리는 죽은 목숨이었네/ 더러는 끌려 나가 수장되고 더 많은 수가 총살당해 암매장되었네/ 죽음은 우리의 형량과 상관없이 무작정 찾
▲ 김관후 작가, 칼럼니스트.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아온 것이네// 살아서 그리운 부모형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다/ 우리는 죽어서도 가 닿지 못하고 이렇게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네/ 되돌아가고 싶다네 가야한 한다네/ 우리가 끌려온 그 길을 되돌려 그 시간을 되돌려 다시 돌아가고 싶다네// 아직도 내 눈에 그리운 고향 식구들의 얼굴이 밟혀있다네/ 죽어서도 형량을 다 채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 나 이제 다시 돌아가려네/ 살아 살아서 살아남은 자들에게 다시 돌아가려네’ - 김경훈의 시 「영령들 가신 길, 살아남은 자 따라나서다」. /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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