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8) 삭은 비닐을 도려내고 새 비닐을 덧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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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하우스의 터진 틈. ⓒ 김연미

막바지에 다다른 것들의 표정은 우울하다. 익숙한 상태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희망이 거세된 낯선 곳으로의 이동은 더욱 그렇다. 빛났던 과거와 바람만 드나드는 현재에 대한 비교, 거기서 오는 우주의 미세한 파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꿈의 상실은 현재를 얼마나 어둡게 하던가.

비닐하우스 샛문 옆으로 바람이 드나든다. 0.1밀리미터 두께가 넘는 비닐을 뚫고 길을 낸 바람의 행동에 우월감이 가득하다. 들고 남에 거침이 없다. 한쪽 옆구리를 터준 비닐이 환자처럼 바람이 하자는 대로 몸을 맡긴다. 바람이 들고 날 때마다 착실하게 제 몸을 비틀어 길을 만들어 준다. 그 몸짓에 주관적 의지는 없다. 공기에 분해되지 않는다던 과학적 이론에도 불구하고 손만 대면 가루가 되어 흘러내릴 것 같은 비닐 한쪽. 긴장하지 않은 몸은 저렇게 쉽게 부서지는 것인가. 오래된 기억처럼 날마다 한쪽 귀퉁이들이 떨어져 나간다.

비닐의 터진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한줄기 오아시스적인 상쾌함을 준다. 한여름 더위와 비닐하우스의 열기가 더해진 상태에서 행운처럼 내 몸을 어루만지는 바람의 손길. 얼굴과 목덜미의 솜털이 살랑살랑 반응을 한다. 평소 느낄 수 없던 작은 세포들이 우수수 제 느낌대로 일어난다. 절대적인 결핍 상태에서 주어지는 아주 작은 만족, 행복함이다. 우린 그걸 모르고 산다. 큰 쪽으로만 방향을 튼 시간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감을 여기서 느끼다니, 농부로서의 프로의식이 부족한 탓이다. 더 이상 비닐하우스의 수리를 미루면 안되겠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었다. 장마의 끝. 더위와의 일전이 남아 있지만 그 싸움을 무색하게 만드는 게 태풍에 대한 대비다. 일 년치의 노고가, 혹은 앞으로의 희망마저 한 순간 무너뜨릴 수 있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지난주부터 남편은 휴일마다 비닐하우스 위를 오르락거렸다. 비닐하우스 곳곳에 난 바람틈새를 다독이고 너덜거리는 비닐을 핀으로 고정했다. 한 자리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자꾸 허공에 제 머리를 찧는 비닐을 줄로 묶었다. 터지고 삭은 비닐을 도려내고 새 비닐을 덧댔다. 바람이 비집고 들어올 만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태풍이 오면 비닐하우스 문을 열어야 할까, 닫아야 할까, 혹시 바람 길을 열어줘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비닐하우스의 얇은 두께가 태풍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지 않을까. 태풍 피해를 보도하는 뉴스 끝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비닐하우스 파손 소식은 다 그런 이유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쉽게 수정되었다. 태풍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모두 비닐하우스 문을 걸어 잠그거나 아예 비닐을 걷어내 집이라는 의미를 해체해 버렸다. 끝까지 저항하거나, 애초에 포기하거나. 간단명료한 행위이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많은 경험과 고민을 충분히 짐작한다.   

한나절의 노력 끝에 팽팽해진 비닐하우스. 저보다 강력한 위력 앞에선 누구든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게 마련이다. 단단하게 제 몸을 감싸 안은 비닐하우스가 자못 비장한 표정이다. 그 단단해진 어깨 안에서 귤나무들의 푸름은 더 짙어졌다. 얇은 비닐의 집 안에서 나무들은 오로지 열매를 키우는 데 골몰할 것이다. 얇고 작은 힘이지만 외부로부터의 완력 앞에 충분히 저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강렬하게 성장을 촉발시킨다.

비닐은 외부로부터의 모든 충격을 막아내고, 나무는 무조건 성장하는 게 그 임무다. 농부는 그 사이에서 무엇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적당한 조절을 해 낸다.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균형적 발전과 분배야 말로 좋은 열매를 만들어내는 공통의 목표를 앞당긴다. 그 목표를 위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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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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