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19) 인생도 서로를 지지하며

▲고구마줄기. ⓒ김연미

식물들에게 장마는 일종의 터널이다. 입구는 넓지만 출구는 좁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 무사히 반대편에 도착한 고구마줄기가 밭담 위를 넘보고 있다. 옆에서 같이 출발했던 배추며 열무는 그 긴 터널 안에서 처참하게 사그라들었다. 비에 처지고, 벌레에 뜯기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배추 쪼가리 몇 개 바랭이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고개를 숙인 배추, 당당하게 둘러선 바랭이. 이미 상황파악 다 끝내고 자신의 처지에 맞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약자 앞에서 더욱 당당하고, 강자 앞에서 움츠러드는 건 식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텃밭 다른 한쪽은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고구마줄기가 바랭이에게 포위된 형국이지만 그것만으로 전세를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장마의 긴 터널을 건너는 동안 오히려 그 세를 더 확장시킨 건 고구마줄기나 바랭이나 마찬가지다. 고구마줄기 우듬지가 정확하게 바랭이들을 겨누고 있다. 우리를 포위했다고? 가만두지 않겠어. 당당하게 머리를 쳐든다. 그 우듬지 아래, 떼로 몰려들어 머리를 들이박고 있는 바랭이. 칠월이 가고 팔월 한복판쯤이면 이들 싸움에 승자가 가려질 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대놓고 고구마줄기 편. 

지인이 가져다 준 고구마줄기를 심은 건 5월말이었다. 심었다가 여름에 나물로 먹으라며 건네준 고구마줄기는 그새 시들시들해 있었다. 이게 살까.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은 흙을 돋웠다. 이랑을 만들고 거기에 물기 다 빠진 채 늘어져 있는 고구마줄기를 꽂아 넣었다. 농업용수를 끌어와 물을 흠뻑 주고 만족한 표정을 짓는 남편. 그런 남편 옆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던 나였다. 저게 살아나기는 할까. 

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하기에도 이상한 모양으로 고구마는 유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랑이며 어디며 빈 공간마다 바랭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 위세에 눌렸는지 고구마줄기는 잎사귀 하나 없이 흔적만 겨우 남기는 것으로 제 존재를 표시하고 있었다. 의심의 눈초리 저 밑바닥에 깔려 있던 희망을 이제 거둬야겠구나 생각할 무렵, 고구마 줄기의 흔적만 남아 있던 땅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났다. 꼬물꼬물.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고 넘었을 싹이었지만 표정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없었다. 희망과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안개에 싸여 있던 7월 장마기간 동안 쉬지 않고 세상을 흡입한 고구마 싹은 이제 이 텃밭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자가 되어 있었다. 

며칠 전 멀리 있는 지인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이 보내져 왔다. 고구마 꽃이었다. 나팔 모양 꽃잎의 보라색감이 가운데에서 바깥으로 퍼져가는 꽃, 고구마 줄기 사이에 선녀처럼 피어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얼핏 본 기억이 있었지만 그 후 사진으로만 보던 꽃이었다. 내심 내 텃밭의 고구마에서도 그 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 핀 고구마 꽃이 내게로 온 것이었다. 세심하게 꽃을 살피고, 그 모양을 담아 보내주신 정성이 참 따뜻했다.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사람들과 주고받는 게 많아졌다.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숫기 없이 멀뚱하게 서 있는 내게 사람들은 자꾸 손을 내밀었다. 지나가다 나와 똑 닮은 호박 한 덩이 놓고 가는 이웃 삼촌이 있고, 밥에 넣어 보라며 삼다수병에 담긴 완두콩을 건네주는 동생도 있다. 내가 가진 건 한라봉 몇 개뿐이라 그걸 건네면 고구마 한 박스 꼭꼭 담아 보내주는 마음 착한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기력이 다 하도록 일을 하다 밥을 먹으러 가면 메인메뉴보다 더 푸짐한 음식을 내주고도 나올 때엔 비닐봉지 한 가득 톳을 챙겨주시는 식당 주인도 알게 되었다.  

세상이 돈만 알아서 돈 없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어디에도 없다고 절망 섞인 목소리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미래는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상위 1%가 하위 99%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99%에 속하는 우리끼리 서로 다독이며 살다보면 장마에도 쉼 없이 커가는 고구마줄기처럼 당당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소외계층들끼리의 연대니 하는 어려운 용어를 잘 모르더라도 말이다. 

고구마 줄기를 살짝 걷어 본다. 고구마 이파리로 둘러싸인 내부는 줄기와 줄기들이 서로 엉키고, 서로 받쳐주면서 단단한 구조를 만들고 있다. 공사 중인 건축물의 내부구조를 연상케 한다. 이렇게 단단한 하부구조야말로 고구마줄기를 성장시키며, 고구마 꽃이 피는 그 지점까지 쉬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리라.  

이제 겨우 이웃의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나 또한 이웃의 어깨에 팔을 둘러 은근히 다가오는 이웃들의 힘과 사랑을 감지하고 있다. 아주 작은 농부가 되어 아주 작은 농부들끼리 단단한 하부구조의 뼈대 하나 세워가고 있는 것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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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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