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개발은행(ADB)의 총재를 8년씩이나 하고 나서 아베 정권의 출범과 함께 일본중앙은행(BOJ) 총재가 된 하루히코 쿠로다는 말한다. "환율은 재무성 소관이고 중앙은행의 관심은 오로지 물가안정이다." 그의 물가 안정이란 인플레이션 2% 타깃 달성을 말함이다.

지난 3년 반에 걸친 '아베노믹스'를 돌아보면 재무성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BOJ가 국채매입이라는 방법으로 돈을 풀어 엔화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만 눈에 들어온다. 돈을 찍어 국채를 매입한 것은 오직 인플레이션 타깃을 달성하기 위해서였을 뿐이고 엔화의 평가절하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는 궤변을 늘어 놓는다. 그러던 그가 지난 7월 29일에는 추가 양적완화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를 저버리고 기준금리와 채권매입의 규모를 동결했다. 이미 마이너스인 기준금리도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국채매입도 한계에 도달했음을 자인하는 듯했다. 2013년 이후 BOJ가 매입한 국채의 양은 273조엔, 월평균 6.3조엔(미화 약 530억달러)에 달한다. 이는 같은 기간 일본 정부 신규 국채발행 물량의 두배, 미국 연준의 국채매입액이 가장 컸던 2012년 중의 월 400억달러보다도 큰 규모다.

그 결과 무엇을 얻었는가? 시장에서 일본국채의 매물이 달려 가격이 오르고 거래 금리는 금년 3월부터 마이너스로 전환됐다. 중앙은행의 예치금리를 마이너스로 정한 나라는 스위스를 비롯해 여럿이지만 이처럼 국채의 80% 이상이 마이너스 투자수익률을 보이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경기회복에도 실패했다.

아베노믹스 기간 중 국내총생산(GDP)은 475조엔에서 503조엔으로 다소 증가했지만 미화로 환산하면 일본 경제는 5.96조달러에서 4.81조달러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추가 양적완화를 하지 못했던 쿠로다의 침묵을 "헬리콥터 머니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헬리콥터 머니' 등장 예고한 것

'헬리콥터 머니'란 50년 전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물가와 화폐의 관계를 강의하며 사용했던 비유에서 유래한다. 어느 날 아침 헬리콥터에서 1000달러를 투하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돈은 주민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것인 바 시중의 상품의 양은 불변인데 화폐의 양이 늘어났으므로 그만큼 물가가 오른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일 뿐 실제로 정부는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지는 않는다. 그 대신 국민들로부터 이미 받은 세금을 환급하던가 그 동안 미루었던 국책사업들을 벌일 수 있다. 경기 침체기에 이렇게 정부가 나서서 지출한 돈은 자재 공급자 또는 공사현장에 투입된 근로자들의 호주머니로 흘러들어간다.

헬리콥터 머니를 뿌리려면 일단 중앙은행이 직접 정부에게 돈을 쥐어줘야 한다. 이제까지의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정부에게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시장에서 매입하는 방법이었다.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은 채권을 가지고 있던 은행이나 기관투자가들에게 전해지는데 그것이 물가에 영향을 주게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은행은 늘어난 현찰을 즉시 대출로 연결하지 않고 기관투자가들은 늘어난 유동성을 다른 금융자산에 재투자하는데 사용한다. 이제까지의 방식은 물가를 상승시키기보다는 금융자산의 가격을 상승시키는 데 그쳤다.

독일 중앙은행의 젊은 총재 옌스 바이트만은 2012년 유럽중앙은행이 이태리와 스페인 국채를 매입하려는 것을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비유했다.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이 악마는 왕에게 기계에서 돈을 찍어 내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묘수를 가르쳐 주었는데 헬리콥터 머니라는 방법은 이 묘수에 보다 근접하는 것이다.

양적완화 뛰어넘는 신약(新藥)

그러나 이 신약(新藥)의 위험은 무절제하게 돈을 찍어내서 생기는 부작용에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 등장 직전의 바이마르 공화국, 그리고 2009년 화폐개혁 직전의 짐베브웨에서 경험되었던 하이퍼 인플레이션(일년에 물가가 100배 이상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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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국주 곶자왈공유화재단 이사장(전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자료사진
는 인플레이션)이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미국과 유럽은 일본이 이 위험천만한 신약의 첫 실험 무대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드러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는 물건은 많이 생산되는데 그것을 살 사람이 없다는 데 있다. 사람을 대체한 자본(기계)은 스스로 소비 능력이 없고 오직 사람만이 소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이 병의 치료약은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다. / 김국주 곶자왈공유화재단 이사장(전 제주은행장)

* 이 글은 <내일신문> 8월 10일자 ‘김국주의 글로벌경제’ 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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