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⑮ 과거의 기억 더듬는 제주 <실연에 관한 박물관>

세계 어느 도시에나 흔히 보이는 풍경중의 하나는 다리나 울타리에 줄줄이 매달린 자물쇠 행렬이다. 일명 ‘사랑의 자물쇠’라고 불리는 이 행렬은 수년 전부터 파리, 뉴욕, 서울 등 대도시의 낭만적인 장소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며 빈 곳에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멀리 던지는 것이 유행이 됐고 이후 거대한 자물쇠 군락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낭만의 도시 파리의 센느강을 가로지르는 퐁데자르 다리 사건은 유명하다. 이 다리에도 사랑의 자물쇠가 쌓이기 시작했다. 2015년 여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자물쇠가 쌓이고 다리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반대의 목소리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자물쇠들을 철거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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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센느강 다리의 사랑의 자물쇠들. 사진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변하지 않는 사랑은 모든 연인들의 소망이다. 사랑의 증표가 오고가고, 연인이 준 손수건 한 장, 책 한권을 보면서도 행복해 한다. 날마다 신문에 등장하는 끔찍한 사건과 혐오성 범죄, 먹고살기 힘든 세상살이를 생각하면 이런 사랑은 퍽도 여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끝없는 경쟁, 전쟁, 테러가 지속되고, 생존과 삶의 의미가 같다는 걸 깨달으며, 권력과 돈을 위해 질주하는 이들 뒤에 남은 수많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대단한 해결책이 나올 것처럼 보이지 않는 현재, 절망과 아픔, 괴로움을 잠시 잊게 해줄 위로와 사랑의 순간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랑만큼이나 깨진 사랑도 흔하다. 심리치료사들은 사랑과 욕망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상대방의 실체를 알게 될 때 깨지는 관계는 욕망의 관계이고, 실체를 안 다음에도 변하지 않는 관계는 사랑이라고 한다. 그럴까? 감각과 호르몬의 지배를 받고 가볍기 그지없는 인간은 날씨에 따라 좋아하는 꽃과 커피향도 달라지는데 사람에 대한 감정이 다를 리 없다. 만질 수도 없고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복잡한 인간의 감정의 스펙트럼 속에서 사랑은 배려와 따뜻함, 기대와 희망, 집착과 강박증, 질투와 분노, 연민과 동정을 오가며 급기야 싸늘한 무관심으로 끝나기도 한다. 사랑의 장애물도 넘쳐난다. 복잡한 현실, 개인의 자유와 시간마저도 통제하는 사회는 사랑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더 힘든 것은 오랫동안 유지된 사랑의 관계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이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사건, 죽음이 그 사랑을 갈라놓기도 한다. 마치 삶의 뒤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듯이 사랑의 뒤에는 항상 실연의 그림자가 기다리고 있다.  

먼 나라 크로아티아의 한 커플이 헤어지고 난 후 사랑하던 시간을 상기시키는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실연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을 만들었다. 문화기획자이자 예술가인 이 커플은 자신들의 관계가 끝났지만 주고받고 공유했던 물건들을 버리기가 아까워 2006년에 ‘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깨어진 관계를 정리하고픈 사람들이 기증한 물건들을 모아 차곡차곡 ‘실연 박물관’을 키워갔다. 한때 사랑의 증표였던 물건이 연인과 사랑에 얽힌 소소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 기념물이 된 것이다. 일상적인 물건을 통해 인간의 사랑을 기리는 이 박물관은 유럽에서 독창적 아이디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급기야 이 박물관은 세계 순회전에 올랐고 한국에도 상륙했다. ‘실연에 관한 박물관’이라는 제목으로 현재 제주의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II에서 전시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전시라고 한다. 제주 산지천을 오가던 무수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밤을 보냈던 모텔건물은 이 전시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 같다. 한국에서의 전시를 위해 아라리오는 올해 초 실연의 사연과 물건을 모집했고 총 82개의 사연이 접수됐다. 제주에서는 16개의 사연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중 67개의 사연과 물건이 크로아티아에서 온 물건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전시되지 못한 것들은 아라리오가 발간한 동명의 책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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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리오 뮤지엄 동문모텔 II에서 열리는 전시, <실연에 관한 박물관>. 사진 제공=양은희. ⓒ제주의소리

전시장의 각 층은 ‘실연 박물관’의 처음 동기가 되었던 연인의 실연에서 시작해서 가족, 어릴 적 꿈 등 한 때 소중했던 사람과 취미를 떠나보내야 했던 사연으로 확대된다. 익명으로 처리돼 누구의 사연인지 알 수 없으나 곰인형, 자동차, 만화책, 모자, 옷, 그림, 카메라 등 평범해 보이는 물건들이 저마다 ‘나’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 사연은 곁에 있다가 사라진 것, 갈 수 없었던 길에 대한 그리움과 미움을 담고 있으며, 고백조로 자기 연민, 질투, 그리고 희망까지도 드러낸다. 실망과 좌절로 쓰레기통으로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물건들이 이 박물관 덕분에 되살아나 우리가 사는 모습에 대해, ‘어떤 사람’과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은 삶의 본질이라는 평범한 진실에 대해 말해 준다. 

오는 9월 25일 전시가 끝나면 물건과 사연들은 다시 크로아티아로 돌아간다. 미처 ‘실연 박물관’에 참여하지 못했더라도 전시를 보며 잠시 사랑과 사랑 비슷한 복잡한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가을의 그늘이 다가오기 시작한 때, ‘실연 박물관’으로 보내고 싶은 물건은 없는지 잠시 과거의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떨까. 

▲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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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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