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3) 다시 잡초를 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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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수원에 돋아난 잡초. ⓒ 김연미

머리를 흐트러뜨린 바랭이가 연하다. 나물로 치면 맛이 제일 좋은 시기처럼 야들야들하다. 아주 연하지도 아주 짙어지지도 않은, 딱 거기 그 만큼의 색감을 지닌 채 나무 아래 무리를 지어 서 있다. 언제 여기다 미래를 예약했던가. 무지막지한 제초제의 폭압에 밀려 목숨을 놓으면서도 용케 씨앗 몇 톨 흙에 떨구고 간 바랭이의 질긴 생명력이 저토록 푸르렀던가.

밀감나무 아래 섬처럼 나 있는 바랭이를 손으로 뽑아낸다. 굳이 호미를 갖다 대지 않아도 쉽게 쉽게 제 뿌리를 드러내는 건, 싸움의 승패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농부 모르게 다시 내년을 준비해 놓고 있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인가.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올라오는 바랭이를 나는 즐기듯 뽑아내고 있다.

올 초 과수원에 깔리듯 자라난 괭이밥과의 싸움은 나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겼었다. 며칠을 두고 떡가래 밀 듯 괭이밥을 매고, 뿌리에 붙은 한 방울의 흙마저 다 털어내고 난 뒤 무덤처럼 쌓여있는 괭이밥의 사체를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었다. 한편 태어난 자리를 잘못 고른 탓에 내 손에 없어져야 하는 괭이밥의 운명에 약간의 미안함을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며칠 가지 못하고 절망적인 표정이 되고 말았으니...

잡초 뽑기를 다 끝내고 난 며칠 후, 깔끔하게 단장된 과수원을 상상하며 문을 연 순간 바닥에 새파랗게 돋아난 괭이밥의 표정에 질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수원 전체를 싹 다 점령하고 다시 살아난 괭이밥. 자잘한 괭이밥들이 제 세상을 만난 피터팬과 그 아이들처럼 놀고 있다가 뜬금없는 나의 등장에 일동 기립 자세로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우린 아무 짓도 안했어요. 당신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김을 매면서 잘게 끊어진 괭이밥 뿌리며, 줄기가 또 하나의 개체가 되어 밭 전체에 파랗게 돋아나 있었다. 김을 매기 전보다 더 넓은 영역을 확보하면서 말이다.

생명의 줄을 이어가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진화를 거듭해 온 그들의 생태를 이 어리숙한 농부가 어찌 알 수 있었으리. 태평농법을 선호하는 동생의 충고를 깨끗이 무시하고, 이웃 농부들의 조언도 귓등으로 들으며 혼자 내린 결정의 결과였다. 결국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제초제를 쓰고 나서야 괭이밥은 밭에서 사라졌다. 제초제의 위력은 놀라워서 성목이 된 밀감나무만을 남기고 모든 식물을 다 없앴다. 풀 한 포기 없는 과수원 바닥을 훑어가며 안도의 한숨을 쉴 무렵, 그 죽음의 땅에 새로운 싹이 다시 돋았다. 바랭이, 금장초, 쇠비름, 다시 괭이밥. 기를 쓰고 올라오는 그들이 일견 반가웠지만 보이는 대로 미련스럽도록 뽑아냈다. 다시 괭이밥과의 패전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손으로 뽑아내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순간 방심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벌레와 병균이 쳐들어오고, 잡초들이 기승을 부린다. 일일이 벌레를 잡고 잡초를 뽑기엔 일손도 턱없이 부족하다. 무농약, 유기농 농사가 어려운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며칠, 소홀해진 틈을 타 다시 세를 확장시키는 잡초들이다. 그새 있는 듯 없는 듯 보호색 뒤편에 숨어서 틈을 노리고 있던 괭이밥도 꽤 눈에 띈다. 내 과수원에서만 뿌리를 내리지 않았어도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시 한편 써줄 용의도 다분히 있었을 것 같은데, 숨바꼭질 하듯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운명처럼 해야 할 판이다. 실벌레처럼 기어가는 괭이밥 줄기를 향해 두툼한 손을 또 뻗는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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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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