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의 숫자가 한해 1만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에 매료돼 바다 건너 제주로 향한다. 여기에 제주사회는 자연, 사람, 문화의 가치를 키우자는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례 없던 이런 변화 속에 제주문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목소리 역시 높다.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제주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고민을 녹여내기 위해 제주출신 양은희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가 [제주의소리]를 통해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양은희의 예술문화 이야기> ⑯ 인어전설, 실험예술제 등...민간 힘 모아야 자생력 길러

세계문화사를 보면 한 도시에서 문화가 유독 융성할 때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17세기 암스테르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파리, 1960년대 뉴욕은 좋은 예이다. 피렌체에서 인간중심의 시각이 예술에 적용되기 시작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암스테르담은 당시의 생활을 그린 장르회화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그림을 소화하는 시장이었다. 근대 파리는 어떠한가. 피카소, 스트라빈스키과 같은 외국인 예술가가 몰려오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 비서구의 문화가 융합되어 혁신적인 예술을 창출했다. 1960년대 뉴욕 역시 전 세계에서 온 예술가들이 자유를 누리며 실험정신을 발산하던 곳이었다. 백남준, 요코 오노, 온 카와라와 같은 아시아 출신 예술가들이 남미, 유럽에서 온 작가들과 어울리며 낡은 창고건물에 작업실을 만들고 소리, 몸, 테크놀로지 등 창작의 영감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도전하곤 했다. 

왜 유독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특별한 문화가 꽃피는지 간단히 대답하기 어렵다. 어떤 곳은 지배계층이 적극적으로 변화를 수용했고, 어떤 곳은 상인계급이 번 돈이 풍족하게 흘러 다녔다. 개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부각되기도 했고, 다양성을 존중했으며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제반 여건이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그 사회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후원하는 열린 태도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제주의 문화는 한국현대문화사에 기록될 정도의 변화를 맞고 있다. 제주출신의 예술가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있고, 각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문화 이주민’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문화라는 낯선 것을 멋있는 것으로 소개했다. 기계처럼 바쁘게 반복되는 도시의 삶을 떠나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표상이 되었다. 이런 변화는 소위 ‘보헤미안 지수’를 높이고 유사한 라이프스타일을 퍼뜨리면서 ‘문화예술의 섬’ 제주를 상상하게 만든다. 제주가 위에서 언급한 사례처럼 문화사에 남을 문화예술 융성의 시대를 이룰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한다.  

당연히 갈등과 위기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지역 예술인은 빠른 변화에 긴장하고 있고, 세련된 기획서가 넘쳐나면서 문화예술재단의 지원 사업에 토박이들이 설 곳이 점차 줄고 있다. 더구나 외부 심사위원 제도는 토박이에게 더 박하다. 예술가의 수가 늘어난 만큼 지역 예술인도 문화이주민도 혜택과 기회가 점점 줄고 있다. 따라서 재단의 한정된 재원이나, 소규모의 공적 지원으로는 모든 예술가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재원을 마련하는 창구로 ‘스토리펀딩’이 부상하고 있다. 최근. 오멸 감독은 <인어전설> (가제)라는 영화의 제작비가 부족하자 스토리펀딩에 ‘제주 해녀 물춤도전기’를 등록하고 모금을 진행하고 있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8976#) 그의 영화 <지슬>이 세계의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난후 척박한 땅에서 훌륭한 감독이 나왔다고 기뻐하며 단체관람을 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그러나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언론의 주목을 받아도 빈곤은 예술가를 떠나지 않나 보다. 요즘 제주의 가장 뜨거운 주제 ‘해녀’를 다룬 영화라 후원자를 찾기가 쉬울 것 같은데도 현실은 녹녹하지 않은 것 같다.   
▲ 오멸 감독의 제주 해녀 물춤 도전기 스토리펀딩 화면. 사진 출처=다음(daum.net). ⓒ제주의소리

2014년부터 서귀포에서 열리고 있는 <제주국제실험예술제>도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예술제는 보통 예술제가 아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 홍대인근에서 진행된 <한국실험예술제>가 모태로, 퍼포먼스, 댄스, 마임, 음악 등 여러 장르가 복합되어 실험적인 정신을 높이 사는 예술의 장이다. 제주에 뿌리를 내린지 3년째, 이 예술제는 벌써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늘 15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많은 예술가가 오는 행사인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서울에서는 자원활동가와 후원자들 덕분에 운영되곤 했으나 제주에서는 그런 인적 자원도 물적 자원도 찾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스토리펀딩으로 모금을 하고 있다고 한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9197#)  
▲ 2014년 제주국제실험예술제의 아트퍼레이드. 사진 출처=JIEAF. ⓒ제주의소리

<제주국제실험예술제>를 이끄는 김백기는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카운터컬춰(counterculture, 반문화, 대항문화)를 이끈 인물 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문화에 점령당한 오늘날의 홍대입구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그는 ‘한국실험예술정신’이라는 조직을 이끌며, <한국실험예술제>를 운영했다. 유사한 생각과 활동을 하는 외국의 작가들을 초대해서 점잖고 세련된 고급문화 이면에 억눌린 감수성, 거칠고, 조야하고, 해학적이며, 신비로우며 때로 B급 같은 적나라함도 포용하는 예술을 널리 알리곤 했다. 2012년까지 10년이 넘게 홍대 앞에서 이런 축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획일화된 미술계에 대한 도전 정신, 제도화된 미술교육 속에서 틀에 박힌 창작언어를 배우다가 탈출하려는 젊은 예술가들과 십시일반 이 축제를 후원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 예술제가 제주에서 지속하게 된다면, ‘문화예술의 섬’ 제주의 향방에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다. 

스토리펀딩에 들어가 보면 제주에 관련된 프로젝트가 더 있다. 4.3 사건 때문에 일본 오사카로 피난을 간 제주인의 유가족을 다룰 다큐 드라마 <오사카에서 온 편지> 등 이미 후원기간이 마감된 경우도 있고, 제주 바닷가의 쓰레기를 수거해 재활용 예술을 선보이는 단체 ‘재주도 좋아’의 <제주바다를 예술이 다시 아름답게>처럼 조용히 후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있다. 

현재의 위기를 타파할 해결책으로 스토리펀딩이 얼마나 성공적일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제주에 민간차원의 예술후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정된 공적 지원금에서 벗어나 창작의 주제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1만원, 5만원, 10만원씩 기부하는 문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감독과 같은 동네 출신이라던가, 해녀 사돈을 두었다는 인간적인 이유로, 또는 제주문화계 중심과 주변에서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최근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는 이유로,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예술 프로젝트라는 사명감으로, 십시일반 도움을 줄 때, 문화의 자생력이 커지며 문화의 뿌리가 단단해진다. 예술가를 위해 주머니를 열자. 

▲ 필자 양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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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미술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영어교육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예술과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 없어서 미학, 미술사, 박물관학까지 공부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졸업한 뒤 서울, 뉴욕 등 세계를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동안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프로젝트 매니저, 교수 등 미술과 관련된 여러 일을 하면서 예술과 사회의 역학관계를 체험하고 연구하고 있다. 11년간 체류한 뉴욕을 현대미술의 눈으로 조명한 『뉴욕, 아트 앤 더 시티』 (2007, 2010)를 저술했으며, 『개념미술』(2007) 등 다수의 책을 번역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를 돌면서도 언제나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었다. 특히 요즘 문화예술의 섬으로 떠오르는 고향 제주를 주목하고 있다. <제주의소리>를 통해 글로벌 시대의 제주의 문화예술 비전을 고민하는 일은 또다른 고향사랑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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