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싹을 올린 초록 이파리를 바라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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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29) 쪽파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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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싹을 올린 쪽파의 초록 이파리. ⓒ 김연미

남들 보다 일찍 찾아온 노안도 이쯤이면 거뜬히 이겨낼 것 같다.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것들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시력이다. 그 시력이 제 빛깔을 분명히 하고 있는 쪽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회복된 듯하다. 모든 게 불분명하고 흐릿한 것들이지 않는가. 저렇게 제 색깔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검은 흙 위에 이제 막 싹을 올린 초록 이파리가 미끈하다. 선명한 초록빛은 내 머릿속 어지러운 생각들을 말끔하게 씻어낸다. 찡그려 있던 눈자위가 편안하게 풀어진다. 자극 하나 없이 내 시력을 회복시키고, 머리를 맑게 만든 초록 이파리들은 미끈한 몸을 뻗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무심한 듯 하면서도 최대한 우아하고 멋있게 포즈를 취한다. 당당하고 아름답다. 그 무엇에게도 꿀릴 것 없다는 저 배포가 부럽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 온전히 나를 보여준 적이 있던가.

이태 째, 친구가 준 씨앗을 받아다 심은 쪽파다. 고구마를 심었던 자리에 흙을 고르고, 이랑을 돋워 하나씩 씨앗을 눌러 흙에 심었다. 특별히 거름을 할 것도 신경을 써야 할 것도 없이 파종은 끝났다. 뿌리를 내릴 땅, 그것으로 족했다. 새카만 한 뼘 땅은 내 텃밭 풍경이 되었다.

농부가 농산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월급쟁이가 제 월급을 떼어주는 것과 같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떠올린다. 친구는 늘 그렇게 제 월급을 떼어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걸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의무를 다 했다는 듯 받아썼다. 쪽파 심을 철이 되고 나서야 나는 왜 올해 심을 씨앗 하나 남기지 않고 김치 만드는데 다 써버렸는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씨앗의 개념이 아직도 머릿속에 없는 나는 영락없이 어리숙한 농부일 수밖에 없다. 다시 우물우물 친구에게 쪽파 얘기를 했다. 두말없이 제가 남긴 씨앗을 덜어준다. 얇은 껍질에 싸인 쪽파 씨앗들이 오소록오소록 소리를 내며 내 손에 들어왔다.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두 번 다시 어리숙하게 굴지 않으리라.

이 동네에선 파나 마늘이 잘 되지 않는다. 토양 때문이라 했다. 어릴 때 기억으론 우리 집 파와 마늘은 늘 그 끝이 노랗게 말려 있다가 튼실한 알뿌리 하나 없이 텃밭에서 사라지곤 했다. 난 그게 우리 집이 가난하고 불행하다는 증거로 삼았다. 근거 없는 우울이 유년기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때였다.

놀거리가 없는 날, 쪽파 이파리는 온갖 노래를 다 연주할 수 있었던 피리였다. 제법 실해진 이파리 하나를 적당히 잘라 입에 대고 가만히 불면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이파리 굵기에 따라 굵으면 굵은 소리, 가늘면 가는 소리가 났다. 자매가 많던 우리 집은 쪽파 이파리 하나씩 입에 물고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을 자주 연주하곤 했다. 무조건 크기만 하면 좋은 줄 알았던 내 피리는 소리가 둔탁했고, 아직 공기를 조절하지 못했던 막내는 쪽파만 뭉그러뜨렸다. 무엇이든 날렵하고 맵씨 좋게 해내던 언니와 동생의 피리에서는 항상 그럴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언니의 피리를 졸랐고, 막내는 동생의 피리를 졸랐다. 텃밭에 쪽파 이파리는 아직 많았다. 언니와 동생은 아낌없이 제 피리를 양보했었다. 그러는 우리들을 어머니는 아까운 먹거리를 쓸모없이 만든다며 야단을 하셨지만 각자 생각하는 대로, 각자 희망하는 대로 피리소리는 멀리 퍼져 갔다.

세상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는 잘 몰랐지만 우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우리도 언젠가 쪽파의 피리소리처럼 쪽파 향 가득한 그 텃밭을 떠날 거라는 사실을. 제가 가진 운명만큼 먼 길을 돌아 어느 나무 아래 깃들기도 하고, 혹은 바람에 몸을 싣고 오랫동안 허공을 헤매기도 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소리에도 뿌리가 있어서 하늘 맑고 나무 울창한 그 때, 바람을 타고 우리들 곁에서 멀어져 갔던 피리소리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모든 것 다 내리고 제 몸 누일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가만히 이파리 하나를 떼어 입에 대본다. 오랫동안 회색빛 도시에서 자극적인 것들에게 맞추어 살던 내 입술은 공기의 미세한 흔들림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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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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