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0) 7월과 8월 불살라버린 열여덞명의 아줌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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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수축산물 홈페이지 제작 강의. ⓒ 김연미

불꽃을 품었다 해서 혼자 탈 수는 없는 것, 2016년 그 무더웠던 7월과 8월을 멋지게 불살라버린 열여덟명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최고참 61세, 막내 27세, 30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사람들끼리 한 방에 모여 공부를 했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주 5일. 농수축산물 홈페이지 제작과정을 듣기 위해 제주시는 물론, 서귀포시, 표선 등지에서 농사를 짓는 여성들이 참여를 했다. 평소 카카오톡이나 밴드 정도 쓰고 볼 수 있으면 족하던 사람들이 인터넷의 바다에 들어가 마음먹은 대로 헤엄칠 수 있을 때까지 부서지고 빠지고 숨이 막히는 두 달간의 훈련이었다. 

우연히 접한 강의 전단지를 보고 홈페이지를 스스로 제작할 수 있다면 매해마다 되풀이 되는 한라봉 판매난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덜컥 신청을 했다. 홈페이지 제작만이 아니라 마케팅 기술까지 교육을 한다 하니 농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내기 농부인 내게는 안성맞춤 교육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교육비도 공짜. 돈 내면서라도 받아야 할 판인데 이런 기회가 다시없다 싶었다. 

신청서를 내고, 사진을 첨부하기 위해 오래 전에 찍어두었던 반명함판 사진을 들고 다시 센터사무실을 찾으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 교육 대상자에서 탈락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 대상자로 선정이 되어도 문제겠다 싶었다. 강의시간이 너무 많았고, 그 기간도 길었기 때문이었다. 

7월과 8월 두 달간,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한라봉은 농부의 손을 제일 많이 필요로 하는 기간이었다. 꽃을 솎아주고, 열매를 따 주고, 그리고 나서 열매 하나하나를 끈으로 다 묶어야 했다. 일손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요즘, 그래서 애당초 남의 손 빌리지 않고 내 손으로만 하고 있는 일인데, 두 달 동안 강의에 묶여 있으면 농사는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양 손에 달콤한 떡을 쥐고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어 고심하는 사이 드디어 교육은 시작되었다. 

각자 컴퓨터 한 대씩을 차지하고 앉은 교실은 너무 더웠다. 에어컨이 켜져 있기는 했지만, 컴퓨터가 내뿜는 열기와 그에 못지않은 사람들의 열기. 더구나 컴퓨터를 처음 만져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그 광활한 인터넷의 세계에 빠뜨려 놓았으니 그들의 내는 불안과 불만과 비명에 가까운 한숨은 교실의 온도를 2도쯤 더 올려놓고도 남았다. 거기다 하루 중 가장 더운 오후 한시 반부터 다섯 시 반까지. 

쉬는 시간이 주어져도 누구 하나 의자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모두들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낯선 컴퓨터 용어와 인터넷 용어를 받아 적어가면서 인터넷 가입을 하고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평소 개인 블로그를 운용하고 있어 얼추 인터넷과 친하다고 자부해 온 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링크를 걸고, 포토그래픽으로 사진을 수정하고, 캘리그라피체로 쓰여진 블로그 이름을 가져다 서명을 만들어내고, 동영상 제작에 편집까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강사님의 설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내 옆자리에 누가 와 앉아 있는지 조차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다섯 시간 가까이 모니터에 집중된 눈을 들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뻑뻑해진 눈의 피로 때문에 운전이 힘들 지경이었다. 더구나 오전에 하우스 일을 하면서 흘린 땀이 들어가 그렇지 않아도 상태가 좋지 않은 눈이었다.   

농사일과 수업이 겹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열두시까지 한라봉 묶는 일을 하고 나서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집에서 밭까지 오가는 시간 두 시간을 제외하면 꼬박 다섯 시간을 일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한 여름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아침시간과 저녁시간이고 보면 여섯시부터 열한시까지만 부지런히 일해도 다른 사람들 하루 일하는 시간과 비슷한 양이 되었다. 

평소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움직인다는 것은 나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도 많고, 천성이 게으른 탓이었다. 그러나 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이유대지 않고 알람을 맞추고 그 알람 소리에 일어나 주섬주섬 챙겨 집을 나서면 어둑한 하늘이 점점 맑아지면서 동쪽 하늘에 해가 솟았다. 로마의 네로 황제가 도시를 불태우듯, 붉게 물든 하늘의 정점에 머리를 내민 아침 태양은 그날 하루를 다 살고도 남을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제주시에서 표선까지 이어진 번영로는 늘 그렇게 아침 태양이 나를 맞이하고 있는 길이었다. 나도 그의 마중을 반갑게 받들기 위해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닦아낼 틈도 주지 않고 땀은 흘러내렸다. 내 몸의 모든 땀구멍을 최대한 크게 열고 쏟아져 나와 피부 외에 모든 스며들 수 있는 것들에게 스며들어 갔다가 다시 넘치고 있었다. 나는 땀이 온몸을 농락하도록 내버려 두고 한라봉을 묶어내는데 몰두했다. 내 몸의 상태를 철저하게 타자화 시켜내면 더위와 땀에 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귤나무에 집중했다. 조금씩 조금씩 초록색 밀감나무에 하얀색 끈이 빗금처럼 쳐져가는 걸 보며 혼자 흐뭇해했다. 강의시간이 기다려지고 아침 다섯 시 번영로에서 만나는 태양이 기다려졌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렇게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나만이 아니었다. 강의를 받는 사람들 중 몇 명이 한라봉을 비롯해서 여름에 손이 많이 가는 감귤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나처럼 오전에 일을 하고 온다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서건 농부가 농사일을 멈출 수 없는 것이고, 학생이 수업을 빼먹으면 안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부지런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답답하던 강의시간도 시간이 갈수록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홈페이지에 블로그를 링크하고, 폴라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가입하고, 하루에 하나씩 포스팅을 하고 나면 그에 반응하는 독자들에게 답변을 해주는 소통이 반갑게 이루어졌다. 그 SNS를 통해 다시 만나는 내 옆자리 동료. 그가 쓴 안부의 글은 유난히 감격스러웠다.  

가끔 자기가 가꾼 블루베리를 가지고 와 쉬는 시간에 풀어놓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6차 산업을 꿈꾸며 만든 한라봉 발효액으로 시원한 음료를 준비해준 동료도 있었다. 날마다 간식거리를 챙기는 반장과, 유독 컴퓨터를 힘들어하는 나이든 동료에게 귀가시간까지 늦춰가며 모니터를 봐주던 나이 어린 동료도 있었다. 뉴스에서는 연일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를 타전하고, 수업 중 갑자기 재난문자가 떠 확인해 보면 여지없이 폭염경보가 세상을 달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더위보다 더 높은 열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더위가 끝나면 바람 선선하고 맑은 가을이 올 것이고, 우린 그 맑은 하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두 달간의 시간은 끝났다.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모든 걸 걸고 집중해 있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끝점에 와 있었던 것이다. 농부와 학생의 이중생활도 끝이 났다. 사상 최대의 맹위를 떨치던 더위도 한 풀 꺾인 지점이었다. 헤어지면서 다시 보자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고스란히 여름을 불태웠던 그 시간만큼은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알기에 슬프지 않았다. 센터에서 기념으로 나눠준 화분 하나씩 가슴에 안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모두 환했다. 그들보다 먼저 여름이 가고 있었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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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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