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1) 여름을 치열하게 보낸 열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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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히 익어가는 한라봉들. ⓒ 김연미

진초록이던 한라봉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무지막지하게 내리치던 햇살을 받아내기 위해 극에 달했던 진초록이었다. 8월의 하우스 안은 햇살과 나무의 한판 싸움이 날마다 치열하게 이어졌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에너지들을 동원해 싸웠다.

8월의 절대 권력인 태양을 상대하기 위해 나무는 진초록이 검게 변할 정도로 모든 에너지를 내뿜었고, 태양도 쉴 새 없이 열기를 내리 쏘았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하는 나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인간의 싸움과 달리 그들의 싸움의 결과는 성장이었다. 누가 먼저 휴전을 제안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난 여름의 뒤 끝, 나무는 한 뼘 이상씩 새순을 올렸고, 열매는 익을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된 것이다. 태양은 뒷짐을 지고 멀찍이 물러서서 나는 모르는 일이오, 딴 전을 피고...

진초록 이파리와 별반 구분이 되지 않던 한라봉이 이제 선명하게 구분이 된다. 진초록 바탕에 살짝 노란 물감을 덧칠한 느낌이다. 살랑, 가을바람 몇 가닥에 초록의 결기들은 어깨를 풀었고, 바람처럼, 여유처럼, 그 풀어진 여백을 채우는 노란색이다. 하루에 한 번씩 물감을 덧칠하는 것처럼 한라봉은 노랗게 변해갈 것이다. 가을바람은 더 세어져 겨울의 문턱을 넘어설 것이고, 하우스 바깥에는 흰 눈이 내릴 것이다. 세상이 추위와 한 판 전쟁을 치르는 동안 한라봉은 그 달콤하고 풍부한 과즙을 담고 우리들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모든 열매들이 이렇게 정해진 대로만 익어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유독 빨리 익는다 싶어 살펴보면 나방에 쏘였는지, 일사병에 걸려서 그랬는지 나무에서 툭 떨어져버린다. 상처를 입고 목숨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정도를 버리고 지름길을 택한 것들의 운명이라고나 할까. 아니다. 지름길을 택한 건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 그들도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그렇게 떨어져나가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가끔 온몸에 곰팡이를 잔뜩 피우고 나무에 매달린 채 말라가는 것도 있다. 병해충 방제약을 제때에 치지 않은 탓이란다. 다 키운 자식을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 중에 하나로 선택되었던 열매인가. 수많은 꽃들 중 하나, 수많은 열매 중 하나가 되어 당당하게 상품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허투루 살다가는 절대 향기 달콤한 과일로 익을 수 없다는 자연의 지엄한 심판이다. 

게으름의 미학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글 한 줄 읽지 않고 흘려버린 나의 시간과, 독립성이라는 이름표 아래 방치했던 아이들의 시간이 갑자기 덩어리째 굴러온다. 내 삶의 곳곳에 구멍 숭숭한 모습으로 포진해 있는, 허투루 살고 있는 시간들. 이러다 어느 순간 툭, 떨어져 내리면 어쩌지? 구멍이 보이는 순간마다 그 구멍을 메꾸기 위해 조급하게 몸을 움직인 시간들도 더 큰 구멍이 되어 그대로 남았다. 여름을 치열하게 보낸 열매들의 저 느긋한 표정을 내 얼굴에서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가. 아, 나도 제대로 익어가고 싶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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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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