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3) 굴린 달걀은 병아리 되고 사람도 굴려야 쓸모가 난다

어릴 적에 많이 보았다. 

암탉이 알을 낳거나 품는 둥지를 제주 방언으로 ‘텅에’라 했다. 병아리를 깨우려 텅에에 달걀 열댓 개 놓아 주면 닭이 그곳에 올라 그것들을 품었다. 집요했다. 

포란(抱卵)은 본능이다. 하지만 단지 품고 있는 게 아니다. 몸을 웅크린 채 꼼짝 않는 것 같아도 가만있지 않고 간간이, 순간순간 옴짝거렸다. 품 안에서 품고 있는 달걀을 굴리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일까. 전혀 아니다. 앞마당이나 텃밭 모롱이에 방사(放飼)해 모이를 주워 먹던 닭들이 저들끼리 무얼 전수(傳授)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닭 같은 미물에게서 교육이란 게 도대체 이뤄질 리가 있는 일인가. 

그런데도 알을 품으면 품에서 알을 굴린다. 부드러운 깃털에 뒤덮힌 아늑한 둥지 속 불같은 어미닭의 체온, 쾌적한 그곳 환경에서 시나브로 병아리가 자란다.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선험적인 행위라 경험에 앞서는, 초월론적(超越論的)인 것이다.

불현듯 ‘줄탁동기(啐啄同機)’란 말이 떠오른다. 

달걀 속에서 병아리는 부리로 껍질 안쪽을 쪼아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바동대는데, '줄[啐, 원음 쵀]'은 병아리가 알껍데기를 쪼는 것, 어미닭은 품고 있는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쪼는 소리에 귀 기울여 밖에서 쪼아 줌으로써 알을 깨는 것을 도와주는데, ‘탁(啄)’은 어미닭이 알을 쪼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알이 부화될 때, 안팎에서 쪼는 행위가 장단 맞춘 듯 거의 동시에 이뤄지고, 마침내 병아리라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자연의 신비란 그 오묘함이 끝이 없다.

옛날 초등학생들이 손에서 놓지 않던 〈아동상식〉이란 책에도 나왔었다. “병아리가 되려면 어미닭이 달걀을 품는 일수는 며칠?” 하고. 

병아리는 21일 만에 달걀을 깨고 나온다. 어김없이 그 날을 채운다. 반드시 어미닭이 품에 품되 단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다. 어미닭이 텅에에서 내릴 날이 가까워 오면 잠깐 내려 여러 홰로 날개를 화급하게 파닥였다. 병아리가 나오기 직전임을 알리는 절박한 몸짓이다. 품은 알을 수없이 굴리는 어미닭의 모정(母情)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에 버금하지 않는다.

문득 떠오른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장편소설 〈데미안〉. 작중 소년 쟌 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자아발견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 거기 나오는 이런 구절이 있지 않은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神)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xas)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제주의 선인들의 예지는 동·서의 문화를 잇는 가교(架橋)다. 사물의 이치를 일찌감치 근본에서 터득하고 통달했다.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일상의 삶, 곧 생활철학의 변경(邊境)으로 흘러 차고 넘쳤던 것이다. 지혜의 원천이 따로 없다. 그것은 학습하거나 이론을 갈고 닦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속에 몸에 밴 것이다.

이 한마디에 또한 무릎을 치게 하지 않는가.

“둥그린 독(ㄷ+아래아+ㄱ)새기 빙애기 되곡 사름도 둥그려사 쓸 메 난다” 한 것인즉 맞는 말이라, 절로 고개 끄덕인다. 알을 품고 굴리는 어미닭의 모습에서 깨달았을 법하다. 달걀을 굴려야 병아리가 되듯, 사람도 굴려야 한다는 말 아닌가. 

알의 부화가 그러하듯, 사람이란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어릴 때부터 교육해야 한다는 빗댐이기도 하다. 흔히 나라의 동량(棟梁)이란 말을 한다. 마룻대와 들보를 이름이다. 집 지을 때 핵심이 되는 것으로 여기에 툭툭 걸쳐 놓는 게 서까래다. 아무나 동량이 되는 게 아니다. 타고난 재능에 더해 후천적으로 그렇게 키워지는 것이다.

요즘처럼 아이를 과잉보호해서는 턱도 없다. 들판에서 서리 맞으며 자란 들풀이 강하다. 보랏빛 투구꽃처럼 모진 풀이 고운 꽃을 피운다. 온상의 화초로 키워진 아이는 약하다. 약한 나무는 꽃 시절도 길지 않다. 사람은 훈육해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이겨내는 방법과 지혜를 일깨워 줘야 한다는 얘기다.

괴로움을 견디게 하는 테크닉, 문제가 주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게 훈육이 도달하려는 지향이다.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룰 줄 알게 해야 하고, 책임을 지도록 하고, 진리에 대해 헌신하게 하고, 삶에 균형을 잡기. 훈육은 사람이 보다 큰 가치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그 길이다.

훈육될 때,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달걀을 굴려 병아리가 되게 하듯 사람도 그렇게 굴려야 사람다운 사람, 유용한 인재가 되는 법이다. 

제주의 속설은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나온 말이 오랜 세월의 뒤꼍을 건너며 구전, 윤색(潤色)돼 오늘 우리 곁에 머무른다. 옛 어른들 숨결에 귀 기울여, 맑은 마음자락에 담아 둘 일이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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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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