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오는 날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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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35) 가지를 잘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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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라낸 가지들. ⓒ 김연미

충직하게 자란 가지들을 다 잘라냈다. 내 팔 길이만큼, 손가락 길이만큼, 늘씬하고 영양스럽게 자란 것들이다. 더러 병충해 때문에 잎사귀들이 뒤틀린 것도 있지만 대체로 보기가 좋다. 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나서도 힘이 남아 있는 나무들은 새순을 올렸다. 잉여의 에너지를 한순간도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취한 만큼 내어놓는 자연의 법칙이다.

여름 순이 적당하게 있어야 다음 해 해거리 현상이 없다고 했다. 열매가 적당하다는 뜻이므로 너무 많은 열매가 나무에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지는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 무엇이든 과함은 족함만 못하다. 

새로 돋는 싹은 병균의 온상이 되기도 하고, 너무 웃자라 나무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혹자는 다음 해 열매가 열리는 가지이기 때문에 잘라내면 좋지 않다고도 하지만 난 아직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하우스 안을 꽉 채우며 웃자란 가지는 좀 잘라내는 게 좋다는 생각에서 가위를 들었다. 열매가 달리지 않는 가지 중에서 새순만을 찾아 가위를 댄다고 했지만 가끔 갓난애 머리만큼 큰 한라봉이 같이 떨어져 나오기도 하고, 여름 꽃에서 맺은 열매들이 골프공만한 크기로 잘려진 가지 끝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웃자란 가지들만 잘라내도 하우스 안이 한결 가벼워졌다. 비닐하우스 천정을 자꾸 건들던 나무들이 얌전하게 손을 내렸다. 

잘린 가지들을 가지런히 모았다. 창포물에 감았으면 좋을 것 같은 긴 머리 같다. 주변에 뒹굴고 있는 끈을 주워 적당한 무게로 묶었다. 잘라낸 가지를 그대로 두면 두고두고 일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하우스 밖으로 치우려는 것이다. 일은 언제나 뒤치다꺼리가 힘들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가지들을 한 데 모으다 보면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나무 아래 깊숙한 곳에 떨어진 가지들을 일일이 다 꺼내어 묶는 게 여간 귀찮지가 않다. 허리도 아프고 손도 아프고 가시가 할퀴고 간 손등과 팔, 다리도 따끔거린다. 그나마 양이 많지 않아서 시간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잘라낸 가지들을 다 묶어서 밖으로 꺼내려고 하니 비가 온다. 비 예보는 내일부터였는데 요즘 날씨는 예보보다 훨씬 비가 많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 귤을 따야 될 시기인데 이렇게 비가 와서 제때 귤을 따지 못하면 걱정이다 싶다.

그런 남 걱정도 잠깐, 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흠뻑 빠져 있다. 빗소리가 좋다.

컨테이너 박스 천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무게가 경쾌한 높이의 음을 만들고 그 빗방울 사이를 흐르는 바람의 세기에 따라 리듬이 만들어졌다. 강약 없이 작은북소리를 내며 가볍게 떨어지는 빗방울들, 잠깐 리듬을 바꿔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소리, 얇은 바람이 끼어들었나. 어느새 제 자리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울리는 작은북소리. 그 사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큰 북소리 들린다. 텅, 텅, 텅, 나무 잎사귀나 전깃줄 같은 곳에 떨어져 고였다가 일정한 양이 되면 한꺼번에 떨어지는 소리다. 딱 알맞은 크기를 내는 팀파니 소리도 들려온다. 저 소리는 누가 내나. 가지가 많이 잘린 소나무, 소나무를 타고 오르는 송악줄기, 노랗게 물든 잎 몇 개 남아 있는 예덕나무,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삼나무 방풍, 컨테이너 뒤에 선 나무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지만 딱히 짚이는 나무가 있는 건 아니다. 딸아이와 그 친구들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것 같다. 북소리만으로 시작되던 아프리칸 심포니. 그 연주곡은 얼마나 멋있었던가. 개구쟁이가 분명했던 육학년 사내아이가 표정 싹 바꾸고 치는 드럼소리에 빠져 난생 처음 나도 드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모든 감각을 접고 오로지 청각만을 열어 빗소리를 듣는다. 듣는다는 것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비오는 날의 오후. 할 일이 없으면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과수원 한 켠에 있는 컨테이너 속에 앉아 오래도록 빗소리에 젖어 들고 있었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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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 서귀포시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시작한 ‘초보 농부’인 그는 <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하루하루 직접 흙을 밟으며 겪은 일상의 경험들을 풀어놓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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