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5) 소라고둥 껍데기 까먹으나 안 까먹으나 한 바구니
  
소라는 속에 든 속살에 비해 껍데기가 엄청나다. 해녀가 바다 속 깊숙이 잠수해 가쁜 숨 참고 캐어 망사리에 담아 짊어지고 나온다. 심지어는 한겨울 설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죽기 살기로 얻은 처절한 노동의 소득이다. 오죽했으면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고 했을까. 해녀의 삶은 끊임없이 깊은 바다에서 이어지는 사투(死鬪)다.

그걸 삶거나 구워 속을 빼면 옆에 쌓인 껍데기가 동산만한데, 알맹이는 고작 작은 양푼 하나도 못 채운다. 소라뿐 아니라 그날 잡은 해산물은 현장에서 계통 출하되지만 내용은 하잘것없는데, 남는 건 껍데기 천지라는 얘기다. 큰 바구니와 작은 양푼으로 대비가 극명하다. 그래서 해녀의 한숨이 길어질 수밖에….

어릴 적에 비슷한 장면을 많이 보면서 컸다. 깨를 거둬들여 묶음들을 마당 둘레를 돌아가며 가을볕에 말렸다. 날씨가 연일 좋으면 하거니와 비라도 오는 날에는 가마니 몇 닢이나 마대로 덮어 비를 그었다. 요즘같이 비닐도 없던 시절이다. 알맞게 말린 뒤 멍석을 깔고 깨를 털었다. 그러고 나면 바람 좋은 목에서 키질로 까불린다. 자잘한 껍질 쪼가리들을 다 쳐내고 남는 깨알들. 옆에 쌓인 깻단은 산만한데 어머니가 털어 담은 깨는 작은 포대 하나를 다 채우지 못했다. 그걸 장에 내다팔아 가용을 했다. 기름으로 빻았지만 됫병 하나가 고작이었다. 말 그대로 한 방울을 아껴 쓰던 촘지름(참기름)이었다.

콩도 매한가지. 콩 가지를 낱낱이 베어 밭에다 널어 말려 멍석 깔고 도리깨질로 거피(去皮)를 내는데 소출이라고 두세 포대. 콩 줄기와 껍데기만 산만큼 했다. 농사짓고 나서 얻은 소출이 그랬다. 그 작은 소득을 위해 파종하고 김매고 거둬들여 장만하고, 농부는 한시도 쉴 겨를이 없다. 그들이 평생 받든 것은 오직 ‘農은 天下之大本’이라는 깃발이었다.

우도의 강영수 시인이 지나는 길에 소라를 비닐에 잔뜩 담아 가져왔지 않은가. 시인의 부인은 해녀 중의 상군(上軍)이다. 그가 쓴 《내 아내는 해녀입니다》는 해녀의 삶을 더 이상 생생하게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하다. 책 속의 주인공이 몸소 캔 소라 선물을 앞에 대하니 가슴 뭉클했다. 우도의 바닷물을 머금은 채 꿈틀거리는 소라를 받아 앉은 순간, 귓전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몇 분 동안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생존을 확인한다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그 귀한 것들을 울 너머 덤불숲가에 가 돌을 받쳐 놓고 하나하나 망치로 깠다. 쉰 가까운 것인데도 까 조그만 함지에 담으니 하나가 차지 않았으나, 손에 드니 묵직하다. 강 시인의 마음이 보태진 무게였을까. 음식을 만든 것은 아내 몫이었지만 그 맛은 몇 년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구젱기 닥살 까먹으나 안 까먹으나 혼구덕”

해녀들이 내뱉는 숨비소리는 예사소리가 아니다. 바다에서 내뱉는 밭은 숨비소리에 이어, 바다 밖에서 옷을 갈아입고 집을 향해 걸으며 몰아쉬는 긴 한숨소리. 하루를 닫는 탄식의 소리다.

바다를 밭으로 살아온 사람들. 해녀들은 갖은 직업병에 시달리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바다에 든다. 내일도 하늬 몰아치는 겨울바다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아이들을 교육시켜 훌륭하게 키우고 나라에 세금 내고. ‘구젱기 닥살이 혼구덕’이어도 그들은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 여든 난 노파도 주저하지 않고 드는 바다다. 바다는 해녀에게 바다가 아니다. 밭이다. 

제주해녀의 문화적 가치를 세계가 인정해 유네스코에 무형문화재로 등재됐다. 변변한 잠수장비도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문화가 오늘까지 전승되고 있고, 여성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으며,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점 등 해녀의 로컬리즘 가치를 인류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그나마 쾌거다. 제주에 내린 축복이 아닌가. 기쁘고 기쁘다. /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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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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