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쉼] 한 해를 보내는 다짐 

서귀포에서 일을 마치고 한라산 중턱을 가로질러 제주시로 가는 횡단도로에 진입한 때는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간간이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저 멀리서 희미하게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망설였다. 그냥 돌아서서 평화로로 갈까, 에이 설마 괜찮겠지.

괜찮았다. 출발하고 30여분 정도까지는. 문제는 그 후였다. 빗방울 섞인 눈발이 뚝 떨어진 기온과 만나면서 도로가 얼기 시작한 것이었다. 앞 차들의 속도가 더뎌지기 시작하면서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갔고 양미간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잠깐 내린 차창으로 기다렸다는 듯 겨울바람이 쌩하니 들어왔다. 다시 차문을 올리고 정신 집중. 성판악이 가까워오면서 길은 더 미끄러워졌다. 얼어붙은 도로에서 마주 오는 차와 도로 한가운데 서버린 차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여기만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에게 계속 속삭이며 천천히 가고 또 가는 사이 차는 성판악을 지나 제주시로 들어섰다. 그리고 조금을 더 가니 도로는 멀쩡했다.

타고 싶지 않은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으로 바들바들 떨며 제주시로 오는 그 와중에 난 문득 대학시절 너무나 사랑했던 장편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신일숙 작)에 나오는 ‘운명이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얻는다’가 떠올랐다.

제주시로 출발할 때만 해도 불과 30여분 후 내가 미끄러운 급커브 오르막길을 엉금엉금 기어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삼십여 분 고생해 다시 얼지 않은 도로를 달려 집으로 오는 동안 ‘여기만 지나면 정말 좋겠다’라는 마음은 다 사라지고 그 자리는 또 다른 사소한 걱정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기껏 얼어붙은 도로 몇 분 운전한 것에 운명을 갖다 붙이는 것은 너무 심한 비약인가? 하하하.

아무튼 운명이란 예측불허……. 반짝반짝 빛나던 20대에 이 말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을 모두 감싸 안은 매력적인 말이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지금 나는 반백년을 막 넘긴 나이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운명이란 예측불허는 매력적인 삶의 키워드다. 그렇지만 살아보니 이 말은 그때가 아닌 지금 나에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사람은 누구나 당장 다음에 일어날 일을 모른다. 내가 눈발 날리는 얼어붙은 도로를 생각지 못했던 것처럼.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면 서귀포와 제주시를 오가면서 급작스런 기온 저하로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나는 것은 흔치않은 일이 아니다. 전혀 예측 불가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 생각에 삶이란 매 순간 순간 선택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매번 눈앞에 벌어진 구체적 상황들은 미리 알 수 없지만 그때 한 선택의 결과물들이 축적되어 다음 선택의 기준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삶이란 그 때 그 때 선택한 결과물들의 총합이다. 지난여름에 본 영화 <매그놀리아>(2000년, 폴 토머스 앤더슨)는 이처럼 우연과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는 삶을 아주 잘 풀어나갔다. 영화의 엔딩은 ‘그렇지만 그 일은 발생했다’라는 글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내가 이제야 겨우 알아나가기 시작한 이 삶의 원칙을 감독은 16년 전에 벌써 알았으니 참 대단하다. (감독은 나보다 어리다!)

사실 삶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이미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한 번 꺼내는 이유는 머리로만 인지했던 내용들이 내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면서 부터다.

그래서 나는 요즘 ‘운명은 예측불허’ 대신 ‘흔들리지 않는 삶’을 내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을 지표로 삼았다는 것은 사실 많이 흔들리는 현실을 반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차 한 잔 마시며 늘 기도한다. 오늘 하루의 삶을 지혜로 채워주길. 결과는 반반이다. 지혜로 상황을 잘 넘겨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때도 있지만 사소한 일에 분노해 스스로 부끄러울 때도 많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기를.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샘이 깊은 물이 되기를.

친구와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다. 공자가 살던 시절에는 40세에 불혹(不惑), 50세에 지천명(知天命)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은 거꾸로 봐야 할 것 같다고. 혹함이 없어야 할 사십대에 오히려 우리를 유혹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할 50대에 오히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이 많다고. 그러니 불혹이라 하면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 지천명이라 하면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강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즘 외모만 보면 사실 40대도 50대도 20대 청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거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다부진 몸매에 피부 시술로 탱탱한 피부를 가져도(특정 인물을 떠올리지 마세요!!!) 눈은 침침해지고 소리도 전처럼 잘 들리지 않는다. 삼일 밤을 새워도 끄떡없이 일어나는 강철체력은 어림없는 말이다. 따라서 외모 가꾸기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나잇값 하는 지혜를 갖기 위한 노력도 같이 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잘 볼 수 있고 그래야 나이 40세에 불혹, 50세에 지천명이 될 수 있다. 그래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쉽지는 않다. 날마다 돌아서며 후회하지만 잘 되지 않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내 기분이 언짢을 때 집에 들어가면 모든 가족이 다 표적이 된다. 남편, 아들, 딸 차례대로 불러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시작한다. 내 딸의 해석에 의하면 이러쿵저러쿵은 엄마는 다 잘하고 나머지는 죄다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잔소리를 하고 나면 나도 좋지는 않다. 이럴 때 내 마음속에 있는 지혜의 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잔소리를 하지 말고 상대방을 달래가며 네가 원하는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유도해 봐.”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정작 밖으로 나오는 것은 더 한 잔소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혜의 소리가 점점 커져간다는 것이다. 이제 더 훈련하고 닦으면 지혜의 소리와 행동이 일치되는 ‘흔들리지 않는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바람섬(홍경희 제주교재사 대표). ⓒ제주의소리
그나저나 평범한 나도 이렇게 미욱하지만 잘 살아보려 애쓰는데 능력이 출중해 나랏일 하면서 돈 받는 사람들은 더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지키면서 지혜롭게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 내 주변 친구 몇몇은 요즘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다한다. 날마다 쏟아지는 매번 충격! 경악!인 뉴스를 보느라. 종일 매 시간 막장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뉴스의 결말이 당연히 원칙, 지혜로 빨리 귀결되길 바란다. 하루라도 빨리.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이제 나이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 내가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길 빌 뿐. 내년에는 더욱 잰 걸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삶’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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