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世通, 제주읽기] (45) 이사야 벌린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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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벌린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박동천 역, 아카넷, 2006
 
1.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진리가 승리할 것이고, 정의는 늘 진리의 편에 선 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은 매우 강력한 것이어서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 믿음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몰매 맞기 십상이다. 그러나 명백한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의에 편들고 있다고 보여지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주장을 내세우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믿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거짓 선동에 휘둘리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들이 올바른 진리를 알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아서 거짓을 진리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통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오히려 문제는 더 악화된다. 멍청하다고 비난받은 그들은 거꾸로 우리가 제대로 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진짜 바보는 우리라고 똑 같은 목소리로 우리를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어버이 연합’, ‘엄마 부대’, ‘자유총연맹’ 같은 관변단체들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증거로 제시된 여러 증거들을 빨갱이들이 조작한 것이며, 국정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결코 사익을 취한 바 없다는 대통령의 말을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놀랍게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촛불 시위의 구호를 똑같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그들에게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시위에 나오면서 돈을 받았을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문맹에 가까운 빈곤한 노인들이라서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상황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정성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겉보기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그들의 열의는 결코 촛불 시위대의 그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 있게 너희들도 돈 받고 나오지 않았느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리 혹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누가 옳은지를 판가름할 최후의 보루로 여겨진다. 정치적으로 화해할 수 없을 만큼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양 진영은 적어도 진리가 승리하리라는 믿음만큼은 확실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이 과연 우리 모두가 당면한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 묻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늘 숭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종청소에 나섰던 집단은 모두 자신들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진리나 진정성이라는 단어에는 그래서 은근히 피냄새가 묻어나는 것이다. 

2. 자유를 위한 사회적 조건

사실 필자도 막무가내로 범죄자 집단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이성이며, 무지몽매하고,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싶다.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에서 그 사람들은 범죄의 부역자들로서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내가 진리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바람은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군대여 일어나라’는 끔찍한 구호를 써들고 나온 그들은 이미 그러한 바람을 우리 쪽을 향해 마음껏 표출하고 있다. 내가 진리의 길 위에 있다고 믿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그만큼 쉽게 위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정치적 자유주의자인 이사야 벌린은 자유의 개념을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두 가지로 구분하고 이 두 개념이 오해될 경우 거꾸로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소극적 자유란 “인민—한 사람 또는 일군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또는 스스로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방임되어야 할 영역은 무엇인가?”의 물음과 관련된 것이고 적극적 자유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 말고 저것을 하게끔, 이런 사람 말고 저런 사람이 되게끔 결정할 수 있는 통제 및 간섭의 근원이 누구 또는 무엇인가?”(343쪽)하는 물음과 관련된 것이다. 소극적 자유란 한 마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할 때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인가를 묻는 것이고, 적극적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할 때 혹은 어떤 정체성을 얻고자 할 때 그 저변에 있는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벌린은 소극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불간섭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특히 경제 영역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이리떼의 자유가 양떼에게는 죽음을 뜻하는 경우란 흔한 것”(129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극적 자유를 확보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지켜주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일과 관련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극적 자유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자유로 여겨져야 하며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자유 따위를 뜻하지 않는다. 소극적인 자유가 불간섭의 원리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거나 내면의 자유를 의미하게 되면 그것은 많은 약자들의 죽음으로 귀결되거나 사회적으로 무능한 개인들의 자기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한편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고자 할 때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 벌린은 적극적 자유라는 발상이 권위의 신격화로 이어지는 일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적극적 자유란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거나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할 때 타자의 욕망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입각해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나 자신’은 많은 경우 현실적인 내가 아니라 ‘진정한’ 나, 즉 진정성에 입각한 나를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 사람들은 찌질한 현실의 자아를 부정하고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과 관련짓는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국가, 계급, 민족, 역사의 행진” 등이다. 벌린은 ‘진정한’ 자아를 통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인 소원을 무시할 태세를 갖춘 것이며, “그들을 억누르고 협박하며 고문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말과 같다”고 주장한다.(364쪽)

벌린의 이런 발상은 좌파와 우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보와 보수 그 어느 쪽이든 진리나 진정성에 입각해서 자유를 쟁취하고자 할 때 쉽사리 전체주의적인 폭력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눈앞의 현실적이고 명백한 악을 마주하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무지몽매함을 목격하면서 사회적인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정부패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닮지 않기 위해서는 더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들을 바보 멍청이라고 욕하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소극적 자유를 위해 얼마나 많은 다양성과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이 벌린의 최종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그들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태극기나 성조기, 역사의 행진 등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지 않게 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각자 자신의 고유한 개성에 눈뜨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문을 열어두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유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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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선 교수

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철학박사
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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