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동아시아 해상의 요충지로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는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제주를 지켜온 관방시설(방어시설)은 고려시대부터 설치돼온 환해장성(環海長城)과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진성(鎭城)・봉수(烽燧)・연대(煙臺) 등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역사학자인 김일우 박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는 이러한 제주의 관방시설에 주목한 논문 《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와 분포양상》을 최근 발표했다. 김 박사는 연대, 봉수 같은 관방시설에는 군사적 가치를 넘어 제주사람의 자생적 의지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제주의소리>가 제주 관방시설에 주목한 김 박사의 글을 매주 2회(화·목), 총 6차례 연재한다. 본문에 '#' 표시된 각주 내용은 원고 하단에 별도의 설명을 달았다. [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머리말
②제주 지역 첫 확인의 관방시설
③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④조선시대 제주 관방시설의 설치 경위와 유형 : 읍성 이외
⑤제주 관방시설의 분포지형과 그 의미
⑥맺음말 

[조선시대 제주 방어유적의 의미] 주 지역 첫 확인의 관방시설 
/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

2. 제주 지역 첫 확인의 관방시설

제주의 관방시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기 시작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거니와, 이는 문헌을 통해서이다.

원종 원년(1260) 무렵에 와서는 앞서도 이야기 했듯이, 제주는 송나라 상인들과 왜인이 수시로 왕래하는 해외의 거진이라는 점이 주목됐음이 드러난다. 이후 고려말부터 조선초기까지, 제주는 왜구의 침탈이 잦았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고려말 충숙왕 3년(1316)부터 조선시대 명종 11년(1556)까지 240여 년 동안 30여 회에 걸쳐 왜구가 제주를 침탈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고려시대는 7회, 조선시대는 23회였다._#8 이와 관련 관방시설도 고려시대부터 들어섰을 것 같으나, 기록을 통해서는 드러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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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삼읍전도 표기의 관방시설분포도. 제공=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제주의소리

제주의 관방시설 가운데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은 삼별초와 관련해서이다.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인 삼별초는 진도로 들어가 용장산성에 웅거한 뒤, 제주 지역을 배후거점으로 확보하고, 진도 용장산성의 함락 뒤에는 잔여 삼별초 세력이 제주에 진입해 들어와 항몽의 마지막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제주 삼별초가 우선 주력했던 일은 방어시설의 구축이었다._#9 이들 방어시설로서는 ‘古土城’(고토성)・‘古長城’(고장성)・‘涯月木城’(애월목성)・‘缸波頭古城’(항파두고성)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고장성과 항파두고성은 부분적으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보수・정비도 일부 이뤄졌거니와, 앞으로도 계속 행해질 예정이다.

특히, 고장성, 곧 환해장성은 제주 해안을 전체적으로 둘러친 3백리 장성이다. 첫 축조는 고려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으로 삼아 대몽항쟁을 벌일 때 시작됐다. 이때 고려왕정의 개경정부는 진도 삼별초의 제주 점령을 저지코자 군사를 제주로 보내 방어시설 등을 설치케 했는데, 이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환해장성이었던 것이다.

원종 11년(1270)에 이르러서는 진도 삼별초가 李文京(이문경) 부대를 보내 제주 점령에 나섰다. 이들은 제주의 서쪽 명월포를 통해 상륙한 뒤, 동쪽으로 나아가 현재 제주시 화북동 지역에 위치한 東濟院(동제원)에 주둔했다. 이어 양자 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끝에, 개경정부 관군은 전몰하고, 제주는 삼별초의 수중에 들어갔다._#10 이후에도 환해장성은 계속 쌓아졌다. 이로부터는 환해장성의 축조가 삼별초에 의해 주도되고, 목적도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때의 환해장성은 해안선을 따라 연속해 쌓은 것이 아니라 바다로부터 적이 상륙하기 손쉬운 곳을 선택적으로 골라 축조됐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환해장성은 계속 보수, 혹은 신축돼 나아갔다. 특히, 헌종 11년(1845)에는 異樣船(이양선)이 牛島(우도) 앞바다에 정박한 뒤, 연안과 섬을 측량하는 일이 벌어지자, 당시 제주목사 權溭(권직)이 군사를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한편, 5개월여 뒤 환해장성의 수축을 행했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기도 하다. _#11

우도 내에서도 근래 들어와 환해장성의 잔존이 확인됐는데, 마을 형성은 헌종 9년(1843)부터 이뤄져 나아간 것으로 이야기한다._#12 이로 볼 때, 우도 현존의 환해장성은 헌종 11년(1845) 이양선이 우도 앞바다에 정박했던 일을 계기로 비로소 들어섰다고 봄이 순리적일 것 같다. 곧, 헌종 11년(1845) 제주목사 권직은 우도 앞바다 이양선의 출몰에 자극받아 우도 지역에 환해장성을 쌓도록 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제주목사 권직은 기존 환해장성의 수축이 아니고, 그것의 신축에 나섰다고 하겠다. 이는 1903년~1905년 제주목사 재직의 洪鍾宇(홍종우)가 편찬한 《觀風案(관풍안)》을 보면,_#13 “이국선이 연안을 순회하기 때문에 환해장성을 새로이 만들었다(刱)”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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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을동 환해장성.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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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확인된 우도 환해장성. 제공=김일우. ⓒ제주의소리

환해장성의 경우는 문헌에 ‘고장성’・‘장성’・‘환해장성’・‘만리장성’이라 기록되었다._#14 환해장성이라는 명칭은 위의 《관풍안》 기록으로부터 보이는데, 金錫翼(김석익)이 1918년에 편찬한 《탐라기년》에서 사용함으로써 보편화되어 나아갔던 것 같다.

지금도 환해장성이 제주시 화북・삼양동, 애월읍 고내리, 조천읍 북촌・신촌・신흥・함덕리, 구좌읍 김녕・동복・행원・한동・평대리 지역에 남아 있다. 또한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온평리, 대정읍 일과・영락리, 보목동・남원읍 하례리 지역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10곳이 ‘환해장성’이라는 이름으로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의 일람표는 다음의 <표 1>과 같다. 이 중 곤을동・별도・애월환해장성은 제주의 대몽항전기 때부터 쌓아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본다. 온평리환해장성은 2.121㎞에 걸쳐 흔적이 확인되고 있거니와, 현 잔존의 환해장성 중 가장 긴 것으로 본다.

환해장성은 현무암의 자연석을 적당한 크기로 분류해 쌓아놓았다고 한다. 현무암이 파도에 씻기고 닳은 둥글둥글한 돌을 이용했던 것이다. 때문에 외관상 해안가 밭이나 경계구분의 돌담, 혹은 바닷물 범람 방지의 돌담 등과 식별이 어려운 경우가 없지 않다. 잔존 높이는 대략 2m 안팎이나, 화북동 경우는 2.8m, 함덕리는 최고 4m의 경우도 있다. 환해장성의 형태는 성 밖은 경사지고 성 안은 높은 것, 또는 성 밖은 경사지고 성 안은 평탄한 것 등의 다양한 여러 가지 모양을 띠고 있음이 확인된다._#15

환해장성은 제주의 관방시설 가운데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될 뿐만 아니고, 가장 장기적으로 축조돼 왔었거니와, 현재도 도처에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환해장성이 제주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련해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움직임과 함께, 제주 해안에 접근하는 외부세력의 양상과 출몰지역에 따라 설치・보수・증치가 이루어져 나아갔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하겠다. 곧, 환해장성은 첫 축조가 13세기 후반 제주의 대몽항전과 관련해 비롯했으며, 이후 왜구와 이양선의 출몰로 말미암아 1845년 무렵에 이르기까지 수축・신축이 지속적으로 이뤄져 나아갔던 것이다.

▲각주
#8
김일우, 2004, <조선시대 제주도 지역의 관방시설 정비와 수산진의 설치>, 《제주문화재연구》 2, 120쪽.

#9
윤용혁, 2000,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30~250쪽.

#10
김일우・이정란, 2002, <삼별초 대몽항쟁의 주도층과 그 의미>, 《제주도사연구》 11, 19~23쪽.

#11
《耽羅紀年(탐라기년)》 권4, 헌종 11년. 

#12
우도지편찬위원회, 1996, 《우도지》, 우도지편찬위원회, 100~101쪽.  

#13
《관풍안》 通政大夫兼防御使(통정대부겸방어사) 權溭. 여기에는 갑진년(1844) 제주목사로 부임한 외관의 이름이 '權稷'으로 나와 있으나, 《承政院日記》를 통해 확인해 보면, '權溭'이라 되어 있다. 아마도 《관풍안》의 '權稷' 가운데 '稷'은 '溭'의 오기일 것이다.

#14
강창언, 1991, <제주도의 환해장성 연구>, 《탐라문화》 11, 108쪽.

#15
강창언, 1991, 앞의 논문, 113~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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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일우 (사)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의 대표 논저

2000, 《고려시대 탐라사연구》, 신서원
2002, 〈고려후기 제주 법화사의 중창과 그 위상〉, 《한국사연구》 119 .
2003, 〈고려후기 제주・몽골의 만남과 제주사회의 화〉,《한국사학보》 15.
2007, 〈고려시대와 조선초기 제주도 지역의 행정단위 변천〉, 《한국중세사연구》 23. 
2015, 〈제주 항몽유적의 역사성과 문화콘텐츠화 방안〉, 《몽골학》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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