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소리>에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놓았던 김연미 시인이 시(詩)를 들고 돌아왔다. 시 한 편과 사진, 그리고 여기서 포착해낸 소중한 삶의 의미들을 차분하게 펼쳐낸다. ‘살며詩 한 편’을 통해 메마른 이 시대의 삶이 조금은 촉촉해지길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살며詩 한 편> (1) 화재주의보 7 / 임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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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조로 어느 들녘에서 바라보는 노을. ⓒ 김연미

출동벨이 울리면 짧은 기도를 한다
큰 불이 아니기를 자체 진화 되기를
단 한 명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기를

출동로가 막히면 또 다시 기도한다
모세의 기적이 폭풍처럼 일어나길
소방차 답답한 가슴
봇물처럼 터지기를

한 발 늦은 화재현장 한 발 늦은 인명구조
‘사망자 1명 발생, 질식소사 추정됨’
숨 가쁜 무전기 소리
허공에서 역류한다

‘나 죽거든 절대로 화장하지 말라’는
어느 영웅 소방관 그 소원이 타는 밤
최성기 내 그리움은
진화되지 않는다

-임태진. <화재주의보 7 > 전문-

고요함을 찢어내는 벨소리에 소스라치듯 뛰쳐나가는 발자국 소리. 누군 운전을 하고 누군 무전기를 입에 대고 상황을 파악한다. 사이렌 소리, 고함 소리, 자동차 소리가 한꺼번에 일어나 엉킨다. 그 혼잡스런 가운데 마음 속 기도를 한다. 큰 불이 아니기를, 우리가 도착할 때쯤이면 자체 진화되어 있기를, 한바탕 헤프닝처럼 없던 일이 되기를. 아니, 백번 양보해 큰 불일지라도 인명사고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시간은 1분이 아쉬운데 꽉 막힌 도로사정. 같은 자리에서 맴을 도는 사이렌 소리. 앞 차량들을 원망할 수도 없다. 비켜주고 싶어도 꼼짝하지 못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또다시 기도할 수밖에. 막힌 차량들 사이로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활짝 열리기를. 

겨우 도착한 화재현장. 한 발 늦었다. 이미 사망자가 발생하고 화마는 모든 것들을 삼키고 난 뒤였다. 화재발생 5분과 10분 사이 모든 것은 결정된다. 그 사이에 도착해야 하는 소방관들의 애타는 마음과 아무것도 못해보고 확인해야 하는 사망자의 이름이 무전기에서 치직거리며 역류한다.  

시인은 소방공무원이다. 그의 평생 실체험이 고스란히 시가 되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을 소재로 삼고 있기에 그의 시에는 막힘이 없다. 미세한 파동에서부터 커다란 울부짖음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와 닿는다.

죽음의 그림자 늘 아른거리는 직업 속에서 비유와 상징의 옷을 입힌 시를 건져 올리는 일은 ‘나 죽거든 절대로 화장하지 말라’는 어느 소방관의 유언을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 한 마디 유언에 담긴 우주 끝까지의 의미들을 시가 아니면 무엇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노을을 볼 때마다 불에 타던 로마를 생각했다. 불속에서 죽어가던 힘없는 사람들의 아비규환과 그 아비규환에 걸맞는 시어를 고르느라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던 로마황제 네로를 떠올렸다. 시공간이 멀어질수록 감정은 희미해지는 거라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노을도 고작 내게는 영화 속 한 장면이거나 먼 역사의 한 조각을 회상시키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원에서 제주시로 넘어오는 남조로 어느 들녘에서 바라보는 노을.  불나방처럼 불 속으로 뛰어드는 소방관들의 발자국 소리 숨가쁘다.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는 화재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시 한 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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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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