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과 속도가 지배하는 요즘, 옛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더구나 그 옛 것에 켜켜이 쌓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응축돼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차고술금(借古述今). '옛 것을 빌려 지금에 대해 말한다'는 뜻이다. 고문(古文)에 정통한 김길웅 선생이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인 제주어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 오늘을 말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길웅의 借古述今] (15) 귀 소문 말고, 눈 소문 하라 

귀로 듣고 소문 하지 말고 눈으로 보고 소문 하라는 말. 실지로 직접 보고 확인한 것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함으로, 말전주를 경계하려는 의중을 담고 있다.
  
비슷한 속담이 있다.
“들은 말 들은 디 버리곡, 본 말 본 디 버리라.”
(들은 말은 들은 데 버리고, 본 말은 본 데다 버리라)

곧 남에게서 들으면 들은 말을 그 자리에서 버리고, 무엇을 보는 일이 있으면 본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을 옮기지 말라는 얘기다.
  
오죽했으면, ‘말전주꾼’이란 말이 생겼을까. 이쪽저쪽 다니면서 말을 전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다. 말전주를 일삼으면서 둘 사이를 직·간접적으로 이간질하는 것이다. 말전주에는 그렇게 하려는 저의(底意)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터무니없는 말을 그럴싸하게 지어 놓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곧이듣게 된다. ‘터무니없는’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곱씹을 일이다. ‘터무니’는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다. 터무니가 없으면 맷돌이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터무니없는 말은 엉뚱한 말이다. 사람들은 엉뚱한 말에 더 잘 속게 돼 있다. 상황이 그만큼 결정적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런 말도 안되는 말, 소설 같은 말을 꾸며 듣는 사람을 마구 흔들어 놓으니 사단이 날 수밖에. 터무니없는 말에 현혹되면 둘 사이에 진실하지 않은 말이 설왕설래하면서 좋던 관계에 결정적으로 금이 가고 만다. 거짓부리로 꾸민 말이 갖는 폭발력은 의외로 커 사이를 더욱 벌려 놓게 되고, 종당에 원수지간이 되는 것인데, 인간관계라는 게 봄 눈 슬 듯 쉽게 풀리겠는가. 이것저것 따지다 보면, 다시 화해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니까 말이 만들어 내는 설화(舌禍)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남의 험담이나 중상(中傷) 따위로 입게 되는 설화야말로 서로 간 자초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설수에 오른다고 한다. 실은 이 말의 뒤꼍도 조심스레 살필 필요가 있다. 구설수라는 것도 알고 보면 남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작은 말실수에서 비롯되기 십상인 때문이다. 섣부른 한마디 말, 그 말에 군말이 덧붙어 가며 와전되기까지 하면서 눈덩이같이 불어나 터무니없는 말로 둔갑하는 수가 왕왕 있다. ‘말 많은 세상이라는 말’에는 다분히 이런 뉘앙스가 풍긴다.
  
꼭 필요한 말, 할 말도 다 못하는 세상이 아닌가. 하고 싶던 말을, 그것도 가감해 가면서 걸러내서 하면 좋다. 정도(正道)에 어긋남이 없는 말, 윤리와 도덕에 반하지 않는 말까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말 속에 믿음과 신의 그리고 진정을 담는데 누가 뭐라 할까. 

‘언즉시야(言則是也)’라 하지 않는가. 말인즉 옳다 함이다. 언중유골, 언중유언으로 예사로운 말 같으나 그 속에 다른 뜻이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 심중한 말까지 삼가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입단속을 해야 할 말은 따로 있다. 분별하지 않고 내뱉은 말이다.

말을 하되, 소문만 가지고 부질없이 말하지 말고 직접 확인한 연후에 하면 화(禍)가 돌아올 리가 없다.

“귀 소문 말앙, 눈 소문 허라”는 속담이 주는 진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조선시대의 작자를 알 수 없는 시조가 생각난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은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말의 속성을 설파한 노래다. 삶의 지혜가 번득이는 백번 옳은 말이다. 가능한 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말을 많이 하는 다변가도 있으나 말이 많다고 달변이 아니다. 설득력 있게 하는 말, 할 말을 골라 하되 이로정연하게 말을 잘해서 달변가다. 
  
풍진 세상에 제 한 몸 바르게 지니려면 우선 나잇값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잇값 하는 길이 열려 있다. 말조심하는 것이다.  김길웅 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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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보(東甫) 김길웅 선생은 국어교사로서, 중등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떠날 때까지 수십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1993년 시인, 수필가로 등단했다. 문학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칩거하면서 수필, 시, 평론과 씨름한 일화는 그의 열정과 집념을 짐작케한다. 제주수필문학회, 제주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문학대상, 한국문인상 본상,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수필집 <모색 속으로>, 시집 <그때의 비 그때의 바람>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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