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2) 고사리 / 오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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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사리. ⓒ 김연미

들판 어디에든 꼭꼭 숨어 있어야 해.

총알이나 죽창을 피하기 위해선 함부로 하늘을 쳐다봐선 안 돼. 두 눈에 불을 켠 산 자들이 너를 만나기만 하면 여지없이 허리를 꺾어버릴 거야. 반백년이 흐른 다랑쉬오름 자락엔 오늘도 안개비만 내리고 한 발의 총탄에 4.3의 짐을 지고 북망산천 떠돌고 있는 형님의 제사상에 올릴 살진 고사리를

아내는
절 하듯 절 하듯
꾸벅꾸벅 꺾고 있다.

-오영호 <고사리> 전문-

제주작가에게 4.3은 영원히 끝낼 수 없는 숙제와도 같은 것. 여백을 채우지 못한 결핍증 가슴에 얹혀 죄인처럼 고개 숙이게 하는. 그래서 유독 ‘고사리’에 시선을 두는 작가들이 많은가. 숙인 고개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손가락에 뚝 꺾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동병상련인가.

다시 사월. 봄 햇살의 미소에 희망을 건 나무들이 기나긴 동면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죽음의 시간에서 생의 시간으로 문턱을 넘어와 그 환희의 꽃잎을 펼치는 사월. 이 찬란한 사월이 우리에게는 왜 이토록 절망적인가. 왜 사월은 잔인함을 유전자처럼 품고 그 진화의 종지부를 찍지 못하는가.

바람이 분다. 머리카락 흩으려놓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고, 왁자지껄 수다처럼  솟아나던 희망의 키워드 싹 다 지우며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속절없이 꽃잎들 떨어진다. 봄 햇살은 따스하리라 철썩 같은 믿음이 아득한 절망 속으로 사라진다. 은폐하듯, 시치미를 떼듯 표정조차 지운 안개비 연일 장막을 치는 사월.

그 절망과 잔인함을 뚫고 고사리가 자란다. 살아남는 게 최선이었던 그날처럼 더 깊숙이 고개 숙이고 ‘꼭꼭 숨어서’ 고사리가 자란다. ‘한 발의 총탄에 4.3의 짐을 지고 북망산천을 떠돌고 있는 형님’도 들판 어느 그늘 아래 그렇게 숨어 살았을 것이다. 이대로 들키지 않는다면 푸른 하늘 아래 두 팔 활짝 들고 나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깊숙이 묻어둔 채로 말이다.
 
무수히 꺾여나가던 사월 장마 속 고사리들처럼 4.3의 안개 속을 뚫지 못했던 사람들 무수히 목숨 꺾인 그 해. 그 해로부터 육십갑자를 돌아오고도 또 이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꼭꼭 숨어 있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고사리에서 우리는 그 해 그 꺾였던 목숨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죽음의 실체를 제물로 하여 제사상이 차려질 때. 그래서 ‘아내는 / 절 하듯 절 하듯 ’ ‘형님의 제사상에 올릴 살진 고사리를’ 올해도 여전히 ‘꾸벅 꾸벅 꺾고 있’는 것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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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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