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많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제, 더 많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며詩 한 편> (5) 중년 / 서숙희

ㅁㄹ.jpg
▲ 파도. ⓒ 김연미

파도가 한  번 밀려왔다 밀려갔다

그 사이
순간인 듯, 영원인 듯
그 사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랬을..., 뿐이다

-서숙희 <중년> 전문-

설령, 내 앞에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부딪쳐 몸 산산이 부서지더라도 달려들기를 멈추지 않던 직진의 시기. 그 청년기를 지나, 이제는 되돌아가야 하는 길만을 남겨둔 잠시 멈춤 상태. ‘파도가 한 번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 사이’ 중년이다.

누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겠는가. 꿈 위에 꿈을 얹고 성장의 길이를 끝없이 연장해 가면서 길 어디쯤 희망이라는 상자 하나씩 듬성듬성 놓아둘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러나 ‘파도가 한 번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 사이’ ‘순간인 듯’ ‘영원’같은 그 지점은 오고,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생각과 생활과 꿈과 희망까지도 재점검해야 하는, 가지고 갈 것보다 버리고 갈 것들이 더 많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점은 오고야 마는 것이다.

방향을 바꾸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이루지 못한 꿈을 폐기처분해야 하고, 새롭게 뭔가를 희망한다는 것도 시간이 부족하다. 애초에 가졌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과, 이제는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기회조차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그 충격은 아주 강해서 오히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표정을 다듬을 수밖에 없다.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아픔처럼 말이다.

중년은 그런 것이다.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가슴 안에 묻어야 하는 시기. 그 묻은 자리마다 여백이 생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침묵하는, 그 말없음표 자리마다 생기는 여백에 무엇을 채워 넣을 수 있을까. 바람 한 자락 스쳐 지나고 나면 더 허허로운 공간만 남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공간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 김연미(시인)  

a1.jpg
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0 / 400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