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있는 나의 그림책'으로 그림책의 재발견에 나섰던 오승주 작가가 다시 고전을 꺼내들었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논어 읽기 시즌2에 맞춰 <제주의소리>에 인문학 함께 읽기 칼럼을 펼쳐놓습니다. 좋은 생각에 힘입어 우리의 행복이 오래 가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논어와 동서양 고전의 향연] (12) 인간을 회복한다는 건 ‘시간’을 회복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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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l 칼 폴라니 (지은이) | 홍기빈 (옮긴이) | 길 | 2009-07-02 | 원제 The Great Transformation (1944년)

폴라니 경제학과 시간

저녁이 있는 삶

듣기만 해도 가슴 떨린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물음은 적절하지 않다.

지갑에 시간이 없지, 돈이 없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고 메모하고 주요구절을 뽑아서 여러 번 읽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홍기빈 박사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이야기로 풀어보는 거대한 전환'도 여러 번 들었다. 한두 번 읽고서는 소화되지 않는 책이니 읽고 또 읽다가 다시 책을 꺼내들고 정독했다. 2009년 가을에 읽고 나서 8년 만에 다시 읽지만 폴라니의 글은 읽을수록 현대적이고 나는 읽을수록 구식 인간이 되는 기분이다.

그 동안 폴라니 관련 책도 많이 출간되고,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니 혹시라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면 당장 관련 해설서나 문건에 관심 갖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행처럼 뜨다 말 사람이라면 이 정도로 진지한 사회적 관심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책으로 리뷰를 써야지 생각한 까닭은 지난 대통령 선거가 그립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때는 시간에 대한 화두가 있었는데 이번 대선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유승민 후보가 토론회에 나와서 자녀가 고3이 될 때까지 3년의 육아휴직을 나눠쓸 수 있고, 영세해서 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부모보험을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다는 공약(일명 ‘유승민 법’) 정도가 다소 위안이 된다.

돈에 대한 화두는 항상 그렇듯 차고 넘친다. 우리가 시간에 매달려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건 참 섭섭한 일이다. 시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5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할 지도 모른다. 시간은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 한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시간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는다면 인류학과 역사라는 주제를 정치경제학의 주된 요소로 삼는다는 점이다. 온갖 신화적인 수사를 동원해 세워진 자유주의의 성채를 허무는 대포로써 폴라니는 역사와 인류학을 사용하고 있다. 홍기빈 박사에 따르면 《거대한 전환》은 독일의 역사학파 경제학자들에게 빚진 바가 크다고 한다.

나는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폴라니의 글에서 시간적인 요소를 리뷰로 버무리려 한다.

아이들이 사회 과목을 어려워하는 까닭

폴라니 경제학의 가장 인상적인 개념은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일 것이다. 경제는 정치·종교·사회 관계들에 뒤섞여 있어서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이다. 폴라니는 최초로 경제 이야기를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가정경제의 원리(householding), 이는 자신이 스스로 사용하기 위해서 생산한다는 원리로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가정 운영의 기술(economia)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경제(economy)'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 『거대한 전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니까 가정 경제와 돈벌이 사이의 구별, 이익을 위한 생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사용을 위한 생산'이야말로 고유한 의미에서의 가정 경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류가 잉여물을 축적하면서부터 약탈과 전쟁이 가속화되었다.

지금은 고유의 경제로부터 정반대가 되었다. 폴라니에 따르면 18세기까지만 해도 ‘시장’이라는 제도는 인간의 다양한 경제 체제 중에서도 무시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거의 절대적인 지존의 위치에 오른다. 자유주의 경제학은 '시장'을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라 ‘경전(經傳)’처럼 성역화시킴으로써 사회를 재편하려고 시도했다. 경전은 감히 건드릴 수도 의심할 수도 없는 권위를 가진 아이디어다.

이 같은 시도가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영국의 산업혁명 때문이다. ‘사탄의 맷돌’ 같은 기계제 산업문명 안으로 빨려들어가 제작되는 인간의 삶. 인간이 시장 법칙의 톱니바퀴로 전락하는 순간 모든 인간성과 유기적 존재는 소멸되고, 상호작용이 완전히 끊어진 원자적 개인주의 사회조직이 들어오게 된다.

이번 대통령선거 TV토론 과정을 보면서 정치도 시장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했다. 사회란 무엇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매일처럼 자괴감을 느낀다. ‘사회’의 실체가 우리 현실에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게 없는 것이다. 사회 과목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람 사는 세상을 돈으로 만들 수 있을까?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은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나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인데 현실은 어떤가?

돈벌이 때문에 가족은 사실상 이산가족이 되었다. 맞벌이 가족의 아이들은 방치된 채 구석에서 스마트폰 베고 잔다. 가족의 터전이 이렇게 취약한데 어느 구멍으로 사회가 자라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어리석은 자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한다. 가족이 목적이고 돈벌이가 수단이라는 말은 당연하지만, 현실에서는 거꾸로다.

‘여가’가 있어야 사람 사는 세상이다

내 회사 동료 중에서 아주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 있다. 매우 성실해서 야근이나 영업 활동에 누구보다 먼저 나선다. 나는 연애는 언제 하느냐고 물었다. 연말에 소개팅이 많이 들어오는데 연말 매출 목표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소개팅을 많이 거절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선거 토론을 보면 출산율이 적은 것은 돈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인식을 각 후보들이 공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본다. 돈보다 여가가 없으니 부부는 애를 못 낳고, 선남선녀는 연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저녁이 있는 삶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이 더 가슴 떨린다.

노동과 여가는 둘 다 필요하지만, 여가가 노동보다 더 바람직하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기계적인 산업 문명과 시장이 삶의 주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기계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의 주인이 인간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인간적인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칼 폴라니는 이 생각의 롤 모델을 로버트 오언으로부터 찾았다. 오언은 인간을 기계의 주인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시도를 했던 사람이다.

노동조합, 아동 의무교육, 협동조합 등 인간의 모습을 한 다양한 조직과 시스템이 오언의 실천에서부터 싹이 돋았다. 인간을 회복한다는 건 ‘시간’을 회복한다는 것과 같다. 시골길에 어느날 철로가 부설된 모습을 상상해 보라. 걸어서 한나절 걸리는 거리가 1시간 안으로 단축되면 그만큼 인간의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오언이 마음껏 실험했던 뉴래너크 공장지대에 담겨 있는 '꿈'을 이야기했다. 이 글의 갈무리로 삼기에 적당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산업적 생산의 조건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는 단순히 임금이라는 것 말고도 숱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과 성인들의 교육, 그리고 춤·음악·오락 등이 제공되었고, 젊은이나 늙은이 모두가 고도의 도덕적·인격적 기준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가운데 산업에 종사하는 인민들 전체가 하나로 뭉쳐 새로운 지위를 획득해나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창출되었던 것이다. - 『거대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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