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되고 3주년을 맞이했다. 기나긴 시간 속에서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만들어온 제주밭담은, 이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물려줘야하는 소중한 인류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밭담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본 연재는 밭담길을 따라 걷다 만난 우리네 삼촌들에 관한 것이다. 밭담과 함께 섬의 살림을 일구어온 한 사람 한 사람의 제주 농민들에게, 미처 보물인줄 몰랐던 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역사가 곧 제주밭담의 역사이고, 삼춘들의 살아 온 이야기 속에 우리가 후세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 숨겨져 있다. 

[제주밭담 시간여행] (2) 구좌읍 월정리 밭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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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동부인 구좌읍 월정리 밭담풍경. ⓒ정신지
보슬보슬 비가 내린다. 흠뻑 물을 머금은 밭담이 검게 반짝이며 초록빛 밭 사이사이를 가로지른다. 간만에 내린 비에 일손을 놓은 하르방들이 노인정에 모여계실 것이란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간을 보내고 계시던 월정리 삼촌(어르신의 제주어)들의 틈에 끼어 앉아 밭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현재 월정리 노인회장을 부임하고 계신 강두언(1939년생) 하르방께 밭담에 관해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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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정리 밭담 이야기를 들려주신 강두언 하르방. ⓒ정신지

할아버지께서 제일 처음으로 담을 쌓으신 것은 언젠지 기억이 나세요?
...이서보라(가만있자), 게난(그니까) 아마 그게 한 열 살 때 쯤 인가? 나가(내가) 1939년에 태어나신디(났는데), 당시 4.3사건이 났어. 그 땐 막(꽤) 두린(어린) 때여도 할아버지영(하고) 고치(같이) 나도 보초를 산(섰어). 호당 한 사람씩 번갈아가면서 보초를 사신디(섰었는데), 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성담을 다왔주게(쌓았지). 
우린 홀어머니가 검질 매래(잡초 캐러) 가불민 아들은 나 혼자 밖에 어시난게(없으니까), 나이가 열 살이어도 담 다우러(쌓으러) 가나서(갔었어). 어린 적에는 자기 힘 이신(있는) 쓱만(만큼만) 허민(하면) 되는 거. '큰 사람은 큰 돌, 족은(작은) 사람은 족은 돌' 행이네(하면서) 쌓는 거라. 지금이야 열 살이민(이면) 아직 어멍 젖 먹을지 몰라도 게, 그잰(그때는) 아이들도 성숙해나서(했었어). 환경에 처하민 다 하게 되어 이서(있어). 
밭에 다와진(쌓여진) 밭담있지? 그걸 허물엉(허물어) 돌 가져당(가져가서) 성담 다와놨주만(쌓았었는데), 후제(그후에) 평화로운 제주도가 되었을 적엔 그 성담을 다시 개인이 가져당이네(가져다가) 자기 밭에 경계선으로 쓰고 했주게...게난 그것이 나가(내가) 태어나기도 전 부터 있던 돌인디, 생각해보민(생각해보면) 돌도 시대에 따라 이디(여기)도 갔당(갔다가) 저디(저기)도 갔당(갔다가) 헌거라이(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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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의 창고에는 담을 쌓기 위해 필요한 전문도구들이 아직 남아있다. ⓒ정신지

밭담은 어떤 과정으로 쌓아가나요?
...기술이 있고 힘이 센 사람이 먼저 '굽자리'를 놔. 제일 밑에 돌을 까는 것을 '굽자리'앤(라고) 허매(해). 그러면 굽자리 놓은 분이 돌을 논(놓은) 자리에, 우리 같이 기술 없고 힘 어신(없는) 사람들이 '거스름돌'을 착착 쌓아 올려. 중간에 쌓아가는 돌이 거스름돌.
"하르방~, 굽자리 놉써(놓아주세요)~!" 하민(하면), 하르방이 "어, 알았쪄(알았어), 놓아가마(놓을게). 손지랑(손주는) 이거 호끔(조금) 우티(위에다가) 잘 씰어오라이(쌓아보거라)." 그추룩 행(그렇게 하면서) 마을 삼촌들이영(어른들하고) 돌 다와난(쌓았던) 기억이 있주(있지). 차곡차곡 담아 올리는 것을 제주말로 '씰어온다'고 하는 거라. 경 햄시민(그러다 보면) 상황에 따라 큰 돌을 깨서 쓸 일도 이신디, 그 큰 돌을 깨는 도구가 '쟁이', '끌'이앤 허는(이라 불리는) 건 돌에 고망(구멍)을 뚫는 거, 망치처럼 생긴 건 '물매'앤 행이네 그걸로 씨게(세개) 치민(치면) 탁탁 금이 가주. 도구를 가진 사람은 '돌챙이'앤(라고) 부르는디(부르는데), 밭담은 그런 사람들이 쌓지 않고, 밭 다진 사름(사람)이 자기냥으로(스스로) 쓰러지민(쓰러지면) 담아가고(쌓고) 하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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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는 파헤치치 말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돌을 소중히 가꾸자는 하르방의 말씀. ⓒ정신지

그렇게 밭담을 쌓던 기억이 사라진 건 언제쯤의 일인가요?
아마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때 즈음일 거라. 그때 부터 사람들이 돌담을 많이 안 쌓았지. 돌이 필요가 없었어 이제. 쓸데 다 써불고(써버리고) 거추장스럽고 하니까. 겐디(근데) 요즘 또시(다시) 돌이 귀해진 것이 잘도(제법) 신기해... 조상 때 부터 쌓아온 건디(것인데), 이제랑 돌 깨가지 말고 고만히(가만히) 보존해시민(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바람이야). 우리 마을은 제주도에서도 샛바람이 가장 심해. 바람이 세부난(세니까) 농사도 배로 힘들어지는 것을 돌담이 그걸 막아주고 도와준  거주게(것이지). 게난(그러니까) 앞으로도 그걸 소중히 해야하는 거라 나 생각에는. 

돌처럼 구르며 살아온 하르방의 삶

'늘 그 자리에서'가 아닌,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리를 바꾸고 역할을 달리 해 오며 오늘날 제주의 땅 어딘가에 존재하는 돌들은 어찌 보면 제주의 어르신들을 닮았다. 밭담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이어진 하르방의 파란만장했던 기억을 따라나선다. 

이 일 저 일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하시던 하르방은 태어나서 줄곧 고향에만 사시던 분이 아니었다. 4.3사건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청년기를 보낸 하르방은 돈을 벌기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일본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타고 있던 밀항선은 일본에 있는 한국인 수용소로 가 닿았고 그곳에서 3년이라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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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동부 해안가 마을의 밭담 풍경. <드론촬영 이준석>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제주 사람들의 밀항은 제주 현대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한일협정 이후 일본과의 교류가 재개되자,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선택의 하나로 밀항을 택한 제주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큰돈을 주고 제주에서 부산으로 혹은 마산 등지를 거쳐 어선을 가장한 밀항선을 타고 조국을 떠났었다. 그렇게 밀항을 하다가 걸린 사람들이 잡혀가는 곳이 일본 나가사키현의 ‘오무라수용소’. 50대 이상의 제주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의 수용소다. 그곳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정착하게 된 재일교포들 중에 잡혀온 사람들이 북한이나 남한으로 송환을 강요당하기도 했고, 하르방처럼 밀항을 하다가 걸려 감금된 남녀노소의 다양한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 

하르방은 그렇게 십대의 끝을 일본도 한국도 아닌 수용소에서 보내야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수용소 생활은 그리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답답하게 갇혀 있었지만 수용소 안의 사람들과 다양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어른들에게 댄스를 배우기도 하고 일본어 책을 구해다가 열심히 일어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자연재해로 기록된 태풍사라호가 닥쳤다. 1959년의 일이다. 수용소의 커다란 기왓장이 머리 위를 날아다닐 정도로 그 피해는 일본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누이의 안부가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쓰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렇게 3년이 흘러, 한일회담이 성사되며 하르방은 한국으로 올 절차를 밟았다.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지만, '가서 부터가 고생'이라는 사실은 수용소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 밀항을 했을 뿐인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받던 이야기를 하르방이 힘겹게 들려주신다.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수용소에서의 기억이 아닌, 돌아온 고향에서 받았던 차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공무원에 도전을 해도 오무라수용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신원조회가 힘들어졌고, 급기야 아무 잘못도 없는 하르방은 힘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괴롭히며 죄도 없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지난날을 기억하기에 이미 시대는 많이 편안해진 거라 하르방은 말씀하신다. 

"배운 게 죄라..." 말씀하시는 하르방 목소리에 힘이 없다. 어려서 부터 남보다 영특해 많이 배우고 싶어 열심히 학교도 다니고, 일본에 계시던 아버지를 대신해 그는 집안의 가장노릇을 해왔다. 그런 하르방이 살기 위해,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여기 저기 돌처럼 구르며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감쪽같이 시간이 흐른다. 

그는 군복무를 위해 육지로 간다. 3년의 복무를 마치고 장기복무를 하며 군인으로 일하고 싶었지만, 홀로 고생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제주로 향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하르방 나이 스물다섯에 늦은 결혼을 했다. 마음에 드는 예쁜 마을 아가씨에게 먼저 다가가 프로포즈를 했다. 결혼 후에도 힘든 일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럴 때 마다 사랑하는 아내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어머니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에 돌이 내려앉는다는 하르방. ‘방 안의 천장과 마루가 맞닿아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해내는 하르방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마흔이 채 되기 전의 일이었다. 그 후 하르방은 살아갈 마음을 잃었다. 그래도 오남매를 기르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내 덕이라 말씀하신다. 중년에 들어서는 서울에 가서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가족이 있는 제주로 돌아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칠십대에 들어서는 모든 것을 접고 평화롭게 살기로 마음먹고 지금껏 그 렇게 살고 있다. 매일 천천히 마을을 돌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고, 노인정에 와 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하루하루가 마냥 고맙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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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 보듬고 가꾸어야 할 것은 우리네 농민삼춘들의 일상의 평화다. ⓒ정신지
 
이런 저런 말을 나누던 하르방이 끝으로 이런 말을 남기셨다.
“사람이 책을 읽고 마음에 선한 양식이 쌓염시민(쌓이면) 자연스럽게 악한 마음은 사라지는 거라. 옛날 막(첨) 어려울 적엔 사람들 마음에 악만 가득행(가득해서) 죄 어신(없는) 사람들 괴롭히고 죽이고 했주만은(했지만), 세월이 지나도 모양만 달랐주(다르지)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이 어서. 세상이란 것은, 사람들 마음에 양식이 어시민(없으면) 아~무 것도 변하질 않주게(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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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지 인터뷰 작가.
그러니, 세상 많은 손주들의 마음에 좋은 양분이 가득하도록 이 사회가 교육을 위해 힘을 쓰길 하르방은 바란다.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작은 돌들이 하나하나 쌓여 담을 이루고 마을을 이룬 것과도 같이, 마음에 좋은 양식을 쌓아 잘 배운 사람들을 제대로 활용하여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하르방은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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