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8) 감꽃, 눈에 익다 / 강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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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꽃. ⓒ 김연미

바람이 손끝마저 놓아버린 입하 무렵
‘곱은다리’ 감나무도 겨운 듯이 굽은 저녁
아기 새 노란 부리로 감꽃들을 쪼았지

감꽃에 허기 달래던 내 아우가 생각난다
비 오면 빗길에서 고무신 접어 배를 띄우던
그 어느 감꽃 지는 밤 그 배 타고 떠났지

사람은 다 떠나도 감나무는 거기 있었네
이십 리 등하굣길 먼발치 눈인사처럼
귀 밝은 감꽃 하나가 손금 위에 놓이네

- 강은미, < 감꽃, 눈에 익다> 전문-

추억 이미지와 연결되는 단어 감꽃, 감나무. 마당 한 켠 어디, 뒤뜰 어느 구석에 어김없이 서 있었던 감나무가 요즘은 쉽지가 않다. 감나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당 있는 집이 사라진 탓일지도 모른다.

수도자의 갈빗뼈 같은 가지들만으로 기어이 겨울을 견디고 난 감나무는 봄이 오는 느낌만으로도 새순을 올렸다. 고집스레 문을 닫아 걸었던 표피를 뚫고 생살 터지듯 초록 순을 내미는 순간, 세상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듯 이파리와  가지를 키우는 나무. 그들의 열기가 우주의 찬 기운을 충분히 다독일 무렵 가지와 이파리 사이 초록 고깔을 쓴 감꽃이 아기 속살처럼 피어난다.

꽃이 열매가 되고 그 열매 씨앗이 되기까지는 물량공세가 최선이었나 보다. 하늘의 별들보다 더 많은 감꽃들은 조그마한 바람에도 쉽게 떨어졌다. 꽃잎의 두께가 다른 꽃잎들보다 좀 두꺼운 감꽃은 아이들에게 좋은 군것질거리였다. 새콤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하고, 아삭아삭 씹는 맛이 좋기도 한 감꽃을 치마 가득 주워 담는 날이면 괜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먹다 남은 꽃잎은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병에 담아 놓고 감상을 하기도 했다. 진하지는 않았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감꽃의 향기는 감꽃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후각의 촉수를 잠시 늦추었다가는 금세 놓쳐버릴 것 같은 감꽃의 향기처럼 우리의 기억들이 아슬아슬해지는 지금.

‘곱은다리’ 그 감나무를 다시 찾은 시인의 생각도 유년시절로 돌아간다. 아기새 부리 같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감꽃을 주워 먹던 유년, 그 유년을 같이 했던 아우는 비오는 날 만들어 띄웠던 고무신 배를 타고 이미 멀리 떠난 후였다. ‘사람들은 떠나도’ ‘감나무는 거기’ 남아 유년의 기억 한 송이 손금 위로 내려주고 있는 것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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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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