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詩 한 편> (9) 오래된 지문을 줍다 / 최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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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미

지문이 꾹 눌린 토기조각을 주웠네
꾹 눌러 문을 열고 꾹 눌러 호적을 뽑듯
그대가 열려고 했던 미로는 무엇인가

먼 별빛 그 너머 몇 백 광년을 두고 온
등고선 비밀지도를 찾아가는 길인가
꾹 눌린 미로 한 조각 강 노을이 번졌네

지문은 뼛속 울음이 골목 끝에 모인 마을
그의 체온 위에 내 지문을 얹었을 때
그대의 문이 열리고 나도 문을 열었다.

-최길하 <오래된 지문을 줍다> 전문-

퍼즐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도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걸까. 오랫동안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 채 시간의 영원과 그 궤를 같이 하던 조각 하나. 시간과 공간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은 제 형체를 허물어 원자상태, 혹은 그 보다 더 작은 무언가로 돌아가는 것. 바람과 비, 햇살의 도움을 받으며 제 몸을 풀어내던 토기 조각이었다.

그 긴 여정 어디에 시인과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었던 걸까. 숨어 있는 작은 에피소드처럼 시인의 손에 들어 올려진 조각이, 비밀스레 오래된 지문하나를 내민다. 처음 토기를 창조했던 사람의 지문이리라. 아주 먼 후대에는 잠겨있는 모든 비밀의 문을 여는 게 바로 그 지문임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이미 ‘등고선 비밀지도’ 같은 지문으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지문 하나로 ‘뼛속 울음이 골목 끝에’ 모여 마을을 만들었던 탄생의 비밀을 캔다. 더 이상 주문을 외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별자리를 그리지 않아도 되었다. ‘꾹 눌러 문을 열고 꾹 눌러 호적을 뽑’으면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기다려서라도 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건너온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토기의 지문 위에 시인의 지문을 댄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고 지문의 주인이었던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 그의 지문이 열려고 했던 것은 시인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몇 백 광년이 흐른 다음에도 퍼즐에서 떨어져 나간 토기 한 조각 주워들고 오래된 지문을 받아든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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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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