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세상도, 느리게 또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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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詩 한 편> (10) 행복한 하루/ 김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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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벌레. ⓒ 김연미

자벌레

걸음으로

술 사 오시는

할아버지

가시는데

반나절

오시는데

반나절

마중 온

할머니 보고

웃는데 또

반나절

-김강호의 <행복한 하루> 전문-

느리게 느리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날이 있다. 손발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혹은 누운 자리에서, 가능하면 생각조차 느리게 하루를 보내고 싶은 날이 있다. 생각해 보면 세상은 얼마나 빨리 돌아가는가. 시간은 또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가.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지구덩어리가 돌고 있다는데, 그 회전의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를 것인가.

그 빠름의 회전력에 휘말려 정신을 온전하게 수습하지 못하고 사는 게 우리 삶이 아니던가. 머리칼 엉키도록 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어느 끝점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이 빠름의 세상에서 4차원처럼, 느리게 하루를 건너는 노부부. 비현실적이고 뜬금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 과거와 미래의 문제가 저 자벌레의 걸음처럼 간단 명료해져버리는 11차원의 어느 한 지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 그러나 이 생경한 풍경이 낯익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4차원의 세계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우리의 유전자 속 어디 그 느림의 미학에 맞는 코드 하나 이미 마련해져 있기 때은 아닐까.
 
말을 하지 않아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표정이 다 보이도록 장치를 해 놓은 시인의 필력이 놀랍다. 할아버지 미소를 따라하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아름다움과 행복을 미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육체의 반응이리라. 내가 속도를 줄이면 세상도 속도를 줄인다. 내 몸 위에 제 체온을 내려놓은 햇살과 더불어 나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오후다. / 김연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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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미 시인은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출신이다. 『연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바다 쪽으로 피는 꽃』을 펴냈다. 2010년 제2회 역동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젊은시조문학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표선면 가마리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제주의소리>에서 ‘어리숙한 농부의 농사일기’ 연재를 통해 초보 농부의 일상을 감각적으로 풀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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